정월 초 여드렛날 날씨는 아직 한겨울이지만 겨우내내 맹위를 떨치던 추위도
어느 정도 물러가고 여하 1~2도 정도의 날씨로 산행하기에는 덥지도 춤지도 않은 날씨다.
오히려 한 낮의 온도가 영상 10도를 넘을 것을 예보하니 겨울 옷을 벗고
봄가을용으로 긴팔 티셔츠에 바람막이만 걸치고 산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굳이 옛날을 들추지 않더라도 몇십년 전까지도 깊은 산골이었을 미사치 고개는
이제는 구례에서 순천으로 넘는 터널이 지나고 있어 도심의 한가운데 들어서 있는 느낌마저 든다.
하늘에 별빛만이 쏟아질 듯 촘촘히 박힌 미사치 황전 터널 입구에
불그레한 가로등은 때 아닌 한 밤에 들이닥친 정맥꾼들의 소란스런 소리에 부시시 잠을 깬다.
3시 28분
한 밤의 산행은 이제 익숙하다는 말이 오히려 낯설 정도로 생활화 되어 있는 느낌이다.
계족산으로 향하는 일반 산행로가 있어 길이 잘 마련된 등산로를 따라
이마에서 빛을 내고 있는 랜턴은 미사치로 향하는 어프로치를 안내하기 시작한다.
바람막이 한겹에 안에는 봄가을용의 티셔츠 하나를 입었지만 춥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심하게 땀이 배이지도 않는 것이 격하게 움직여야 하는 정맥타기 등산에 딱 좋은 차림이 되었다.
15분 만에 어프로치를 끝내고 고갯마루로 올라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정맥의
마루금을 따라 급경사의 길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늘 그렇듯 야간 산행은 주변 경관이 볼 것이 없으니 걷는 것에만 신경이 집중되어
엄청난 속도로 진행을 한다. 산행 시작 30여분이 지나면 몸이 풀리기 때문에
이 후 날이 밝아 아침을 먹기 까지 5시간 정도는 단 한차례도 쉬지 않고 빠른 발걸음을
재촉하니 완전히 캄캄한 야간에 지나는 거리만 통상적으로 10Km가 넘는다.
한여름에는 수풀로 우거져 산길을 찾기 때문에 다소 속도가 늦춰지는 면이 있지만
겨울에는 나뭇잎과 수풀이 없어 랜턴 불빛으로 쉽게 마루금을 잡아내므로
멈칫거릴 이유가 없어 체력이 닿는 한 속도를 내기 때문에 더욱 빨라진다.
출발한지 1시간이 되어 4시 27분에는 벌써 고도를 500여미터나 올리고 2Km나
진행을 해서 계족산으로 향하는 삼거리에 올라선다.
이 곳은 순천시 서면 황전면과 광양시 봉강면이 닿는 3면 경계점으로 지금부터
오른발은 광양시를 밟으며 왼쪽으로 북쪽을 향해 마루금은 방향을 바꾼다.
상수리 나무 가지로 간간이 내려다 보이는 마을의 불빛이 아스라이 멀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고도를 상당히 높여 올라온 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사치 고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눈이 마루금에 잔설로 군데 군데
남아 있다. 부드러운 능선 길에 남아 있는 잔설도 다행히 얼어 붙어 있지 않은
모습이라 아이젠 착용은 하지 않고 빠른 발걸음을 옮겨 4시 32분 깃대봉을 넘어
흘러 4시 58분에는 광양 봉강면에서 올라오는 월출재 임도를 만난다.
차량이 통행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 놓은 임도를 다시 한번 가로 질러 월출봉으로 오른다.
고도를 700이나 올라온 임도 탓에 순천 구례 광양이 갈리는 삼군봉인 768미터의 월출봉은
야산으로의 역할 밖에 되지 못한 형상이 되었다
일반 산행으로는 그다지 특징이 없는 산인지 표지조차 없이 헬기장에 삼각점 하나로 위치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이 곳에 달이 뜨려면 달을 보는 위치는 황전면이 되어야 할 것이니
월출봉의 이름도 황전 사람들이 지어 놓은 이름일 듯 하다.
깊이 내려간 분지 지형인 황전에서 보름달이라도 구경할라치면 다른 곳과는 달라
저녁 8시는 지나 깊은 밤이 되어야 달이 산 위로 얼굴을 내밀 듯 싶다.
생각없이 산행을 하다가는 이곳에서 직진을 해버리기 딱 알맞은 장소다.
마루금은 오른쪽으로 예각으로 바짝 꺽어 급경사를 타고 내려간다.
다행이 앞쪽으로는 눈이 쌓여 있고 선답자의 발자국이 없어 길을 잘못 들 염려는 없지만
여름날의 산행에는 지도를 머릿 속에 넣고 긴장을 해야할 듯 싶다.
마루금을 따라 도는 임도를 다시 가로 질러 서서히 고도를 높여 부드러운 육산에
화강암이 여기저기 얼굴을 보이며 정상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리기 시작할 때 쯤
5시 55분에 형제봉 표지석을 지난다.
두개의 연이은 봉우리로 인해 지어진 이름이지만 7Km를 진행한 이 시간에도
아직도 주변은 밤이고 하늘은 보석 같은 별로 총총하기만 하다.
덕유 소백산 능선처럼 이어진 연봉들의 조망이 화려하게 되는 이 곳을
밤에 지나치려니 아쉬운 마음만 가득하다.
느끼고 살피며 답사해야할 많은 정맥길 정신없이 밤길에 묻혀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 놓치고 지나간다. 다음에 여유가 되면 밤 길에 놓치고 지난 흔적들은
다시 밟아볼 생각을 하고 있지만 특히 가을 단풍으로 갈아 입었을 때 이 곳의
경치도 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의 경사를 살짝 내려 새재를 6시 19분에 지나
마루금은 다시 오르막으로 방향을 바꾸어 도솔봉을 향해 달라 붙는다.
서서히 별빛이 하나둘 꺼져 가고, 검은색의 하늘 빛이 청색으로 변해가며
주변의 시야를 넓히기 시작하니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반이 지나 10Km를
진행한 끝에 고도를 1123미터까지 올려 도솔봉 표지석을 잡는다.
선선이 머물어야 할 도솔봉은 소백산 남능선 백두대간 길에도 조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곳도 저 멀리 따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화려한 조망으로 백운산 줄기를 보여 준다.
내리막길 미끄러짐을 막기 위해 아이젠을 차고
급경사를 따라 정신없이 내리다가 따리봉 능선 너머 백운산 정상으로 올라오는
아침 해를 맞는다. 새벽이 되면서 구름이 몰려와 흐려진 날씨에 태양은
하얗게 빛바랜 모습으로 구름 속으로 들어가 이내 모습을 감춘다.
이따금 부는 바람과 함께 고도를 바짝 올린데다가 햇볕까지 들지 않으니
산길을 걸어도 몸이 더워지지 않고 오히려 한기를 느낀다.
참샘이재 풀밭에 앉아 카스테라 두개와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해결한 후
7시 55분 발길을 움직여 급경사를 하나하나 발을 옮겨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몸에서 열이 나기 사작할 때쯤 8시 22분 따리봉에 오른다.
백운산 이어지는 마루금은 또 한차례 급경사길을 내렸다가 이어진다.
건너편 백운산과 억불봉으로 흘러나가는 능선이 화려하게 눈에 들어온다.
3백여미터를 정신없이 쏟아져 내린 급경사는 자동차도 넘나들도록 잘 가꾸어진
한치 고개를 8시 48분에 가로질러 왼쪽 발에는 구례도 보내고 광양으로 들어서서
백운산을 향해 오르막길로 접어 든다.
키가 큰 상수리 나무와 박달나무등 활엽수와 함께 군데군데 소나무 잣나무가
서로 자리 싸움을 하는 듯 이루어진 숲은 오히려 작은 싸리나무나 철쭉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시원스런 모습을 보인다.
1년여.. 천오백여리를 밟아 내려온 호남정맥도 서서히 마무리를 할 때가 되었다.
아직은 춥던 지난해 이른 봄 새벽..영취산에 뛰어 올라가 시작했던 호남 정맥은
4계절이 지나며 서서히 끝을 보여 가고 있다.
혼자가는 산행에서는 혼자서 화두를 던지고 답을 찾는 것도 버릇이 되었다
신경을 집중할 수 있으니 지루하지 않고 몸의 피로도 자연스럽게 잊게 된다.
눈 위에 思자 한글자를 그려 넣는다.
생각할 사..그리울 사..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그리워할까
왜 밭田 아래에 마음心을 심어 생각이라 했을까.
골몰히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몸은 저절로 들어 올려져
9시 43분 신선대 암봉 위로 오른다.
백운산 정상은 어느새 운무로 가득히 싸여 있고
1200미터의 고도는 바람조차 세게 불어대고 있다.
신선대에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먼 곳 조망은 되지 않는다.
신선대 위에는 묘가 한기 자리잡고 있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후손의 발복을 얼마나 기원했으면 이 산 위에 묘를 쓴 후손도 정말 대단하다.
상수리 나무 가지와 소나무 잎에는
구름이 지나며 이슬이 맺히고..
그 이슬은 또 다시 얼음이 되고..
영롱한 모습의 맑고 투명한 얼음 꽃이 열렸다.
이건 서리꽃 상고대도 아니고
이런 모습 보기는 정말 쉽지 않은데
백운산 정상은 화려한 겨울의 보석꽃 잔치를 열었다.
닫힌 마음..
보석꽃은 내게 닫힌 마음을 열어 놓을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투명하게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 할 일인데
나는 사심과 욕심으로 닫힌 삶을 살아 오지 않았던가.
생각도 그리움도..
내 마음이 닫혀 있으면 더욱 더 힘들기만 한 것을..
어느 덧 거친 바위의 모습이 만히이 나타나는 길을 지나
10시 15분 백운산 정상의 표지석을 잡는다.
여기까지가 여암 신경준 선생님이 지도에 그려 놓은
호남정맥 산경표의 끝이다.
감회에 젖어 상봉 표지석을 어루만지며 둘러 보지만
운무에 싸여 있는 백운산은 사방의 조망을 보여 주지 않는다.
인생에 그리 많은 것을 보며 살아 가려 하지 말라는 듯..
앞으로 타고 나갈 외망 포구까지의 마지막길을 안내하는
섬진강 줄기만이 빠르게 흘러가는 운무 속에서 희미한 모습을
보였다가 이내 감춰지곤 하는 가운데
억불봉으로 향하는 등산로에서 왼쪽으로 급히 틀어 넘어
섬진강 쪽으로 향하는 매봉 능선을 타고 흘러 내린다.
11시 57분 매봉을 지나
섬진강을 오른쪽에 끼고 잔펀치로 출렁거리는 능선에는
해방 이 후 6.25가 끝날 때까지 사용되었을 참호의 흔적만이 무성하고
서로의 생각만 다를 뿐..
사람답게 살고 싶어 울부짖다 산 속으로 들어와 생을 마감한 민초의 영혼은
백운산 자락의 흔적만 남은 참호 위에서
이미 50년의 상수리 나무로 변해 섬진강을 내려다 보고 있다.
이러한 일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할텐데
내가 아닌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우리 모두가 알면서도
행동은 우리가 아닌 내가 사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세상의 갈등과 불신은 증폭되고..
증폭된 불신은 화약이 되어 사회 곳곳이 곪고 터지고..
오늘 산행에 얻은 소중한 가치 맑은 마음을 안고..
오른쪽 계곡을 따라 외희마을로 흘러 내려 1시 43분에
마루금 답사 발길을 접는다.
'호남정맥 > 호남정맥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호남 20(외희마을 쫓비산 토끼재-국사봉-망덕산-외망 포구) (0) | 2010.03.09 |
|---|---|
| 호남 18(노고치-바랑산-송치-갈미봉-마당재-갓거리봉-미사치) (0) | 2010.02.07 |
| 호남 17(빈계재-조계산-접치-노고치) (0) | 2010.01.18 |
| 호남 16(천치재-존제산-주릿재-석거리재-백이산-빈계재) (0) | 2010.01.04 |
| 호남 15(봇재-오도치-방장산-주월산-모암마을) (0) | 2009.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