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호남정맥산행기

호남 16(천치재-존제산-주릿재-석거리재-백이산-빈계재)

만석공원 2010. 1. 4. 13:44

영하 10도의 한겨울 밤바람이 춥다.

 

옷을 여민채 밤 10시 무박 산행을 위해 사당역으로 향한다. 정맥꾼으로 버스 한대가 

채워지지 않아 산행비 할인으로 끌어들인 조계산 일반 산행객까지 합쳐 버스는

꽉 들어찼다.

 

정맥길이 6시간이 예정되고 다음 길은 11시간으로 길으니 불합리한 산행 계획으로

인해 버스 안에서 벌어진 갑론을박 끝에 고동치까지 8시간 주행을 제안해서 밀고

가기로 결정을 했다. 두시간의 산행길을 더 하면 다음에 어프로치를 빼더라도 1시간 20분이

줄어드니 산행에 무리가 되지 않고 시간도 절약될 듯 싶다.

 

장흥 보성 바닷가를 돌던 정맥길이 고개를 돌려 북쪽으로 향했다 해도 길은 멀다.

차는 호남고속도로를 틀어 돌아 주암 IC를 빠져 나와 송광사 입구에 조계산에 일반 

산행객을 내려 놓은 후 모암 마을을 향해 머리를 돌린다

 

4시 27분 네비도 길을 제대로 못찾아 헤매인 끝에 모암마을 끝 어프로치 입구에 도착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별이 얼어 붙은 듯 반짝이고 동짓달 스무날의 하현달이 군데 군데

남은 잔설을 더욱 반짝이게 비추는 가운데 짚티에 방풍 자켓을 내피까지 씌워 지퍼를 끝까지 올려

단단히 방한 준비를 한 후 지난번에 내려온 비포장 임도를 따라 어프로치를 시작하여 4시 39분

천치 고갯마루 정상에 도착한다.

 

깊은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이름지어진 지명이 유난히 많은 이 곳 남도 땅.

천치는 하느님과 부처님이 만나는 곳이라 해서 이름지어졌다는데 보성군에서는 설명하고 있지만

문헌상으로 기록된 사항에 대한 안내가 없으니 확인할 방법은 없다.

 

온도는 영하 4~5도 정도라도 바람부는 날씨에 새벽의 체감 온도는 영하 10도는 족히 넘을 듯 하지만

임도길을 올라오는 잰걸음에 벌써 몸이 후끈 달아 오르기 시작하니 고갯마루에서 방풍 자켓 내피를

벗어 배낭에 넣은 후 고개 왼쪽 들머리를 잡아 마루금 정맥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급경사의 오름길은 새벽 바람의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등줄기에는 땀이 배어 흐른다. 방풍 자켓

앞섶을 열어 젖히고 들어오는 엄동설한의 매서운 밤바람이 오히려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5시 6분에

존제산 정상에 오르니 출입금지 군사보호시설 팻말이 반긴다.

 

한 낮이라면 오른쪽으로는 멀리 남해바다에 떠 있는 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서야 하겠지만

어둠이 아직 깊은 이 시간에는 바로 산 아래에 위치한 보성군 조성면의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 빛만

산 위를 깜박깜박 졸린 눈을 비비며 비추어 댄다.

 

충렬왕이 남해 때 존자산이던 이름을 고쳐부르라 해서 존제산이 되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저 멀리

우뚝한 제암산을 바라보는 줄기 모습으로 인해 존제산이 되었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원의 속국이

되어 왕으로 격하되고 삼별초의 항쟁으로 국가가 어수선한 때에 원에 의해서 거의 독자적인 정치를

했다고 볼 수 없는 충렬왕이 이 곳까지 내려왔다는 것 조차도 반란 습격 등의 문제로 원행을 거의 하지

않는 왕들의 습성으로 볼 때 그 사실을 믿기란 대단히 어렵다.

 

굳이 사대주의적 생각이 아니더라도 당시에 처해 있을 왕의 입지와 친원파 관료들이 득세하고 있었을

것을 보면 오히려 원의 황제를 염두에 두고 충성에 대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산의 이름을 작명했다고

추정을 해 보거나 아니면 오히려 충렬왕을 완전히 배제하고 생각해 본다면 불자들을 보호하고 농경과

민간의 수복을 관장한다는 측면에서 불교신앙과 민간토속신앙에 나타나는 제석신으로 연결해서 제석신을

떠받드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것이 바닷가인 벌교의 진산인 이 존제산

주변에는 예로부터 인근에 농사를 짓거나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우러러보고 신앙으로

삼을만한 우람한 모습을 갖춘 산이기 때문이다.

 

정맥꾼들로 인해 뚫린 철조망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능선을 걷는다. 능선 위에는 군사시설인 몇개의

콘테이너 박스와 함께 어둠에 싸인 이층의 콘크리트 폐막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KT 통신탑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동편의 정상으로 돌아 올라가는 길목에서 열려 있는 군부대 정문을 나와 능선을 따라

개설되어 있는 군 작전 도로로 마루금을 잇는다.

 

스무날의 하현달 빛이 밝으니 도로에 남은 잔설로 길이 환하다. 문득 인공으로 만든 조명이 싫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에 달은 헤드 랜턴을 끄고 달빛 만으로 의지해서 길을 걷는다. 살집이 제법 통통하고

부드러운 여인네의 허리선처럼 흐르는 존제산 위의 능선에 하얀 달빛이 쏟아지고 드문드문 남은 하얀

눈은 햇볕을 반사시켜 가는 길을 밝힌다.

 

문득 추운 겨울날 달빛 속에 뛰놀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얼마되지 않은 기억 속의 시간도 이미 40여년이 훌쩍 넘어버린 시간들이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이라도

함께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 좋았고 보고 싶은 친구가 있어 좋았다. 이렇게 달빛이 마음 속까지 적셔

들어오는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상상으로만도 행복한 감정이 밀려 온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내리던 마루금은 도로를 따라 굽이치며 내리다가 도로를 버리고 왼쪽 산길로

들어가 급경사를 내렸다가 다시 굽이쳐 돌아 내려오는 도로와 만나 흘러 내려 6시 6분 주릿재에 닿는다.

 

올라오는 길이 밧줄을 늘어 놓은 듯 구불구불 올라와 이름이 지어졌다는 주릿재.

소설 속에서 조계산으로 피해 있던 염상진과 빨치산 일행이 밀고 내려와 점령했던 농민해방구가 된 

율어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이 고개에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문학비가 자리잡고 있다

  

징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 끝가지에 붙어있는 하나씩의 잎사귀인 셈이었다

 

태백산맥 소설 속의 한귀절이 문학비에 새겨져 있어 아직도 정리되지 못하고 아픔만을 간직한 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있는 현대사의 쓰라린 기억을 더듬게 만든다.

 

존제산에 대해 벌교에서 부르는 이름인 징광산..

이 커다란 산줄기인 징광산에서 벌어진 나약하고 착취의 대상이기만 했던  민초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들을 태백산맥 가지 끝의 잎사귀의 떨림으로 보았다면 한반도를 소용돌이로 밀어 넣은 우리의

현대사 한세기에서 조정래 작가는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주와 소작농으로 연결되어 착취로 구별되는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대결 ,도저히 신분의 변화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는 암울한 미래 속에서 벌어지는 암울한 투쟁과 기만, 때마침 벌어지는 혼란 속에서

속이고 무참히 짓밟고 빼앗는 사람들과 목숨까지 초연하게 모든 것을 내던지고 저항하는 사람들..

 

그 가늘게 떨리는 태백산맥의 끝 잎사귀에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잎사귀의 뿌리와 줄기는 지금도 남아 언제든지 도화선에 불만 붙으면 잎사귀가 흔들리던 그 때의

들불처럼 번져갈 기세로 숨 죽이며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은 나만 드는 것일까.

 

계속 벌어져 가기만 하는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와 함께 사회적으로 풍족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책들이 하나하나 들불을 위한 재료를 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녘 저편..

뗏목다리라는 말이 한자로 차용되어 지명이 된 벌교 쪽으로부터 조금씩 붉은색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장의 증명을 남긴다. 길을 건너 오르던 길은 바로 능선으로 접어 들어 왼발은

보성군을 벗어나 순천시에 놓인 낙엽을 밟고 흘러가다가 6시 22분 깊은 절개면으로 인하여 철계단까지

설치된 외서면 반용리로 넘어가는 마을길을 가로 질러 마루금을 이어간다.

 

반용리 위에는 마루금까지 농장이 만들어져 있고 임도를 따르던 마루금은 능선 정상에서 6시 51분에

고사리 재배지역 표지판을 감싸고 우측으로 45도 예각으로 바짝 꺽어 농장 관리용 콘테이너 박스를 지나

마루금 위로 만들어 놓은 임도를 따라 흘러간다.

 

왼쪽 사면으로 훤하게 벌목이 되고 과수나무를 심어 잘 관리되고 있는 농장의 마루금 임도가 끝나고

산길로 들어가 두어번의 너울로 내리던 마루금은 환하게 밝아오는 아침을 맞으며 7시 30분 벌교에서

광주로 넘어가는 길목인 석거리재에 내린다.

 

주유소도 문을 닫고 휴게소도 문을 열지 않은 이른 새벽 바람을 피해 구석에 앉아 커피한잔에 카스테라로

아침 요기를 해결하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추운 겨울 산행에서는 끓여 먹을 수 있는 상황이거나 2끼니

이상을 해결하는 장거리 산행이 아니면 도시락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빵이나 잼과 함께 따뜻한 커피와

함께 간편하고 부담없는 식사가 오히려 펀안함을 가져다 준다.

 

옛날 스님들이 모여 문장 자랑을 해서 이름 지어졌다고 보성군에서 설명하는 석거리재는 꼭 문장 자랑이

아니래도 지금은 폐사로 흔적조차 없어진 징광사로부터 선암사 송광사 등 거대한 가람들에 둘러 싸인

중심에 있었으니 이 고개를 넘어 다니는 이는 스님이 태반이었을 듯 싶다

 

멀리 봉우리 위로 해가 드는 것이 곧 고개마루도 햇볕이 들겠지만 언제나 해가 들기 전이 가장 추운 법이다.

7시 52분 고개를 넘는 새벽바람에 근육 수축이 불규칙하게 일어나기 시작할 정도로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니

다시 배낭을 지고 백이산을 향해 발길을 올리기 시작한다.

 

능선을 밟기 시작하자 백이산 가지 능선을 넘어 태양이 모습을 보이고 마루금 오른쪽은 채석장으로 바짝 깍아

내어 위험표시의 출입금지 표지와 함께 로프가 쳐져 있다. 100여미터는 깍아 냈음직한 채석장 가장자리를

끼고 올라 두어번의 전위봉을 타고 넘던 마루금은  몇걸음의 발목 풀기를 위한 수평 능선이 있을 뿐 쉼없는

오르막으로 이어진 끝에 억새밭으로 사방으로 조망이 환하게 트인 백이산 정상에 8시 40분에 올려 놓는다.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려면 대개가 회복이 어려울만큼 부패 했다.

물론 그 부패가 차기에 세워진 정권들이 자신들의 정당성 부여를 위해 확대 과장한 면도 간과할 수 없지만

반란이 일어나고 새로운 세력에 권력이 넘어가는 일이 벌어지기 까지는 반드시 내부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나라를 기울게 만든다는 경국지색 미모의 여인 달기에 빠져 구정은 뒤로 하고 폭정을 일삼으며 주지육림으로

세월을 보내던 은나라 주왕은 새시대를 여는 주나라 무왕에게 천하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이렇세 부패한

은나라에서 녹을 먹던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에 충성을 할 수 없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산나물만 캐 먹고

살며 일생을 마친다.

 

이렇게 부패하고 폭정만 일삼는 왕이 통치하고 있다가 망해버린 국가에 무슨 명분이 있어 이 같은 절개를

지켰는지 알기 어렵지만 후세 사람들은 충절의 표본인 듯 기회만 있으면 백이 숙제를 회상시켰다.

 

충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예쁘게 했을 뿐 내가 보기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죽을진들 채미도 하난것가

비록에 푸새엣것인들 귀뉘따헤 났다니.

 

김천택의 청구영언에 수록된 성삼문의 시조..

문득 소시적 입에 달던 고시조 한편이 떠오른다.

 

어린 조카 단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대해서 충성을 거부하고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은 같이 일을 꾀하던 김질의 배신과 밀고로 잡혀 안타깝게 수레에 몸이 묶인 채로 수레에 찢겨 죽는

거열형을 당했다. 권력의 정당성은 권력을 가진자가 자신의 마음대로 각색하고 미화를 하고 주무를 수

있으니 성삼문의 뜻이 아무리 고귀한들 이루지 못한 뜻은 무슨 의미가 있으리.

 

어찌하여 이 산의 이름이 백이산이 되었을까.

고사리가 많이 나는 산이라 하여 백이산이 된 것일까.

존제산을 곁에 두고 충절을 하는 산이란 것일까.

순천시에서도 이 산의 유래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만 그만한 높이의 산들이 줄기를 뻗고 그 줄기들이 겹쳐지고 이어지면서 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 그건 산들이

손에 손을 맞잡은 강강술래 춤이거나 어떤 성스러운 것들을 받들어 올리고자 하는 산들의 어깨 동무였다

백이산에서 바라보는 존제산의 모습은 이렇듯 태백 산맥 소설 속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앞 쪽으로는 고동산 조계산으로 이어가는 정맥 마루금이 커다란 파도처럼 넘실댄다.

고동산 앞에 고동치까지 2시간이면 넘어갈 듯 한데 후미 쪽에서 빈계재까지만 가겠다고 연락이 오니 모두

백이산 위에서 사방 조망을 구경하며 산행을 접고 기다린다. 1시간이 지났는데도 후미는 올 생각을 하지 않고

석거리재 휴게소에서 밥을 먹고 있단다. 몸은 식고 추워지는 산 위에서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어 9시 40분

백이산을 떠나 10시 2분 빈계재에 내려 오늘의 정맥길 산행을 마감시킨다.

 

후미 도착이 아직 1시간 반 이상은 될 듯 하니 고갯마루에서 기다리기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고갯길을 걸어 내려 10시 40분 낙안 읍성으로 내려 간다. 선암사 일반 산행의 시간 계획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으니 낙안읍성을 맘놓고 구경하기도 쉽지 않다. 전화를 해보니 버스가 곧 떠난다고 대답이 들어오니

움직이지 못하게 발이 묶인다.

 

대충 낙안읍성 주변만 맴돌다가 11시 30분에 도착한 버스를 타고 빈계재 위에서 후미를 실은 후에 12시에 벌교로

이동해서 꼬막정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1시 30분에 서울로 차머리를 돌리며 호남정맥 16차 구간을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