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이렇다 할 첫눈도 구경 못했다.
비난 며칠간 을씨년스런 날씨만 영하의 온도를 오르내릴 뿐 흩날리다 지워져 버린 눈발 외에는
보지를 못했으니,출근길 교통 대란이야 어찌되든 하얗게 세상을 덮어 주는 눈이 은근히 기다려
지기도 한다.
하얀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을 전남 장흥군으로 떠나는 호남 정맥길은 윗지방과 판이한 날씨 탓에
준비부터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방풍자켓 내피 짚티 등 겨울 산행을 위한 옷가지 몇
개를 꺼내 놓고 저울질 해보지만 두껍게 입으면 더울 듯 하고.. 얇게 입으면 추울 듯 하고.. 그렇게
산을 다녔어도 날씨에 맞도록 옷을 입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일반 산행이면 그럭저럭 흘러가는 산행이라 이런저런 옷을 많이 짊어져도 되고, 또 산행이 여유로워
땀도 흘리지 않을 것이니 걱정을 하지 않겠지만,정맥길 종주는 늘 빠른 걸음으로 흘러야 하기 때문에
온 몸에 땀이 배이니 짊어지고 움직일 옷 무게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 주에 부르튼 윗 입술은 연고를 발라도 나을 생각은 하지 않고 큼지막하게 세 곳이나 상처로
윗 입술을 덮었다. 어지간 하면 집에서 쉬라고 말리는 말에도 불구하고 정맥길을 나선데는 20Km
의 짧은 산행이라는 매력과 함께, 두번이나 빠진 호남 정맥에 대하여 또다시 마음가짐을 다잡아야
하겠다는 개인적인 결심도 합쳐졌다.
짚티 하나 입고 방풍 자켓에 내피를 끼워 내피를 탈착이 쉽도록 하는 선에서 산행을 끌어가야 겠다는
생각으로 배낭을 꾸려 사당역으로 향했다. 한 차를 채우기에는 이제는 역부족인지 몇명의 취소자까지
겹쳐 23명만 태운 차량은 홀가분하게 호남 지방을 향해 한 밤의 어둠 속을 가르기 시작한다.
몸의 컨디션도 아주 안 좋고 입술까지 터져 피곤하던 차에 모처럼 버스에서 꿀 같은 잠을 청한 듯 하다.
비몽사몽 간에 느끼기로는 중간에 어디에인가 멈추었던 듯 한데 기억이 없고, 백양사 입구에서
내려 새벽 잠을 털어 낸다. 물 두병 사고, 우동 한 그릇으로 따뜻하게 배를 채운 후 다시 출발 하지만
잠이 깨어서인지 좀처럼 다시 잠이 들지 않는다.
버스는 어둠에 잠들어 있는 아파트 단지들을 지나며 광주 시내 외곽 순환 고속도로를 거쳐 2차선
지방도로를 따라 화순을 지나 장흥으로 내려 간다. 어둠 속에 잠들지못한 가로등 밑으로 시골 마을이
지나고 차량은 곰치를 넘어 달려 내려가는데 마을로 들어가는 월곡마을 진입도로를 지나친다.
지난 번에 월곡마을에서 나올 때 보았을텐데 어째 그냥 지나칠까 무심히 생각을 하고 아무말 안하고
있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차량은 피재로 넘어가 위치를 못잡고 우왕좌왕 버스를 돌린다. 나는 산으로
향하는 길이나 산행 길이나 더 없이 소중하게 기억하려고 애쓰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냥 산을 간다는
의미 외에는 그다지 크게 마음에 두지는 않는 듯 하다. 낮에 풀 한포기 나무 한포기 빠뜨리지 않고
흘러가고 싶지만 시간의 제약으로 무박 산행을 하는 것이 늘 마음 한구석이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갈
때가 많이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님에게 월곡 마을 입구 도로의 안내를 해 주었다.
곰치에서 내려 오면 새 길을 건설하는 철다리를 볼 수있는데 그 철다리 밑에서 우회전하여 마을 끝
까지 들어가야 월곡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우왕좌왕 하던 사이에 시간은 가고, 산 속 깊숙히 자리한 월곡 마을에 4시 5분에 도착하여 내린다.
육십여호가 살던 마을이 이제는 예닐곱호만 산다는 월곡 마을은 그 이름답게 달빛만 교교히 비치는
깊은 산골 마을이 된듯 초승달이 넘어간 이 새벽녘에는 하늘은 온통 별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많은 별들을 본 것이 언제이던가.
새벽 손님을 반기는 마을의 개 짖는 소리를 벗 삼아 추수가 끝난 논 끝으로 이어진 임도를 따라
오리온 별자리의 베텔기우스의 안내를 받으며 장고목재로 발걸음을 옮긴다.
1.3Km의 어프로치를 따라 4시 35분 장고의 목처럼 잘목한 모양 때문에 이름이 지어졌을 법한
장고목재 위에서 마루금을 잇기 시작한다. 오늘의 산행은 20여 Km로 짧은 편이지만 잔펀치에
체력이 급격히 소모되는 100~200 미터 높이의 너울이 12개나 존재한다는 산행이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도 몸이 달아 오르도록 10여분 후끈하게 올려 부쳐 흐르다가 능선을
밟던 길이 다시 한번 고도를 올려 부치니 12개 중 처번째 봉우리인 가지산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지나 낙엽을 밟으며 부드럽게 돌아 내리던 길 모퉁이에서 가지산은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나 올라 있다. 배낭을 벗어 내려 놓고 가지산 암봉에 올라 보림사 밑 계곡을 바라 본다
초겨울 밤..시리도록 총총한 별빛이 조용히 잠든 계곡으로 쏟아져 내리고, 마을의 불 빛은
깜박깜박 새벽잠에 취해 졸고 있는 모습이다.
보림사는 이 땅에 서기 860년경 선종을 처음으로 들여온 절이라 한다. 백과사전에는 중국
가지산 보림사 인도 가지산 보림사 한국 이 곳의 가지산 보림사 3개가 있어 3보림으로 일컬어지고
구산선문의 제1가람 가지산문의 근본 도량이라 적혀 있는데 산은 그럴듯한 정상석도 하나 없는 암봉으로
되어 있다. 불교의 역사와 함께 구증구포의 보림차 문화까지 살아 숨쉬는 보림사는 따로 시간을 내어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돌린다.
고도를 낮추어 가던 마루금은 5시 40분 장평면 우산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나 다시 고도를 높여
오늘 넘어갈 12봉 중에 하나 뿐일 무명 봉우리를 지나 내려 정성 들여 가꾸어 놓은 청주한씨 선산 묘역을 거쳐
양봉 벌통이 놓여 있고 고사리 재배단지인 듯 출입금지 팻말이 걸린 고사리밭 곁의 임도를 따라 내려
6시 21분 장평에서 유치 보림사를 잇는 2차선 도로가 지나는 피재를 지난다.
한걸음 한걸음 또다시 고도를 높이는 사이에 하늘의 별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어 가고 검기만 하던 하늘이
옅게 파란색으로 채색되어 가기 시작한다. 하늘은 왼쪽 끝부터 아침 노을이 붉게 채색되지만 동쪽 하늘에
펼쳐진 구름으로 인해 일출의 모습은 오늘도 구경을 하지 못하고 밝은 아침과 함께 7시 34분에 병무산
표지판이 나뒹구는 헬기장 정상에서 아침을 먹는다.
보온도시락 뚜껑을 열어 보니 아직 밥이 따뜻하다. 이상하게 대간이나 정맥길 산행 중에는 갈증 때문인지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아 물을 말아 먹는 것이 습관화 되었다. 보온 물통의 물을 따라 물을 말아 먹는다.
어느 덧 계절은 제법 차가운 날씨가 되어 있으니 손이 금방 시려 온다. 방풍 자켓을 꺼내 입었으니 땀흘린
뒤의 몸이라도 몸은 그리 춥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대간을 종주할 때는 쉴 무렵이 되면 속도를 줄여
최대한 몸에 있는 땀을 줄였는데 정맥길은 함께 움직이고 또 빨리 움직이니 몸의 조절도 여의치 않다.
일행 중에 라면을 가져 온 분이 있어서 라면 몇줄기와 국물을 얻어 먹으니 속이 따뜻하다.
커피 한잔 을 더 얻어 마신 후 탐진댐 건너편의 예쁜 암릉의 산을 바라 본다. 언제 한번 가봐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와 지도를 살펴 보니 수인산이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다시 마루금을 잇기 시작한다. 약한 너울을 지나 다음 봉우리로 건너니 병무산
이정표가 버티고 있다. 이 곳이 병무산인지 조금 전 밥 먹은 곳이 병무산인지 아리송하다.
한글로 모두 표기되니 병무산의 이름 유래를 대충의 감으로도 잡을 수 없다. 이런 때는 표음문자 보다는
표의문자인 한자가 의미 전달에는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또 한차례의 깊은 골짜기로 내려섰다가 봉우리를 넘어서지만 오늘 넘을 12개 중에 몇번째인지는 이제 관심이
없다. 왼무릎에 약간 통증이 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늘 4시간 정도 후에 오는 통증은 6시간 정도
주행하면 없어지기 때문에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 급경사를 타고 아주 깊이 내려간 길은 임도가 지나는
금상재를 지나 급경사 오르막을 앞에 내 놓는다.
제법 땀이 송글송글 온 몸을 감싼 뒤에 카메라가 설치된 산불감시탑이 자리잡고 있는 용두산 정상에 오른다.
주변을 둘러 보니 주변에 있는 산 중에서는 가장 고도가 높다. 해발 551미터가 새겨진 작은 화강암으로 만든
정상석까지 있으니 산의 모양을 갖춘 셈이다.
이어진 마루금은 다 허물어진 무명묘를 지나면서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임실 이후로 편백나무 숲은
이따금 나타났다. 사람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일반 나무보다 5배나 많이 배출한다는 편백나무 숲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접해서인지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 내리막길을 내렸다가 하나의 무명봉을 넘고 다시 내렸다가 올라서니 길이 모호하다.
분명히 길은 왼쪽으로 틀어지는데 통상적으로 알바를 막기 위해 길을 막은 모양으로 통나무가 가로 막았다.
희미한 길을 따라 20미터 정도 직진해서 봉우리를 가보니 삼각점만 달랑 있을 뿐 더 이상 길의 흔적은 없다.
다시 돌아 리본이 달린 길을 따라 돌아 들어 내리다가 9시 52분 잘 가꾸어 놓은 경주이씨 묘소 앞에 앉아
사과 몇쪽과 함께 물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9시 59분 묘소 바로 밑을 지나는 만년고개의 시멘트
농로를 가로질러 오르막길의 마루금을 잇는다. 이름도 없고 특징도 없는 봉우리는 고도가 350~450 사이를
넘나들지만 봉우리를 잇는 능선은 별로 없고 하나를 넘을 때마다 계속 고도 100정도 이상의 출렁거리는
너울을 보이면서 잔펀치로 체력 시험을 한다.
대간 탈 때 신고 모셔두었다가 오랜만에 신은 중등산화는 발이 편하지 않아 엄지발가락 끝에 불편함이 온다.
여름 경등산화에 맞춰 발의 형상이 약간 변한 모양이다. 거기에다 겨울용 등산화이므로 땀의 배출이 쉽지 않아
양말이 젖는 느낌까지 들고 발바닥 깔창이 문제인지 앞 쪽 발바닥이 부담스럽다.
이 등산화에 발이 다시 맞춰질 때까지는 불편함이 계속 생길 듯하다. 마주 올라오는 등산객들을 만났다.
버스 한대를 풀어 놓은 모양이다. 시목치에서 피재까지 움직이는 듯 하다. 암봉을 지나 371봉을 올라서니
제암산이 바짝 코 앞으로 다가섰다. 왼쪽 만년동으로 흘러가는 2번 국도는 차량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끝날
지점이 서너개 잔펀치 봉우리를 넘어가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왼쪽 방향으로 바짝 틀어가는 마루금을 따라 걸으며 지나온 용두산을 바라보니 아득히 멀어져 간다.
고려 시대에 고을 이름이 지어진 장흥 땅은 인종비인 공예태후 임씨의 고향이 장흥이고 인종비가 낳은 3명의
왕자가 의종 명종 신종이 되니 보기 드물게 3명의 왕을 낳은 왕비이니 이 공예태후의 덕으로 오랜동안
흥하라는 의미에서 장흥으로 지어졌다고 유홍준씨는 설명하고 있다. 장흥임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임호가 장흥의
천관산 아래에 자리 잡으면서 그 아들 임의는 숙종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임원후는
고려 인종의 왕비인 공예왕후의 아버지로 의종때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장흥 부원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왕건의 훈요십조에 차령 공주강 이남은 산세가 거슬리는 모양을 하고 있으니 이 남의 사람을
등용하여 권세를 쥐게 하면 혹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적혀 있으나 위와 같은 고려시대의 장흥 임씨의
권세를 살펴보면 그다지 맞는 말이 아닌 듯 싶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조선 선조 임진왜란 3년 전에 때 천하 공물설을 주장하고 나서 온나라를 발칵 뒤집고
대사헌 직책을 받았던 정철에 의해 천여명의 동인계열 관리들이 숙청된 도화선이 되었던 정여립의 반란
음모와 함께 벌어진 기축 옥사를 거치면서 임란 이후에 호남에 대한 차별이 본격화 된 것으로 생각된다.
부드러운 마루금을 흘러 또 하나의 봉우리를 넘어 제암산을 바라보고 있는 무명묘소 앞에 앉아 잠시 휴식을
갖는다. 좌측 대퇴부가 약간 당기는 것이 근육피로가 오는 모양이다. 7시간의 산행에 대퇴부에 피로가
오기 시작하다니 격한 산행이 근래에 없었던 탓에 산행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은 아닌가 은근히 걱정스럽다.
앞에 보이는 제암산을 다음에 새벽에 지날 생각을 하니 많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급경사 길을 내렸다가
마지막 봉우리인듯 한 350봉을 향해 오르막길을 밟는다. 편백 나무 숲으로 따라 완경사의 즐거움을
선물하던 길은 능선을 타고 올라 방향을 왼쪽으로 틀며 참나무 낙엽길로 변해 약간의 숨을 거칠게 만든
다음 봉우리를 타고 넘게 만든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내리막길에 발을 딛으니 우측이 벌목된 환한 조망에 저 멀리 고갯마루에
버스가 반갑게 기다리는 모습이 보인다. 단걸음으로 달아 내려 11시 39분에 갑낭재에서 오늘의 산행을 마친다.
공식적인 명칭은 시목치라 하는 것을 보니 枾木峙로 감나무재를 한자로 옮겨 놓은 듯 하다.
그렇지만 고개에 쓰여진 갑낭재의 명칭은 보검에서 칼을 빼는 형국이라는 뜻의 匣囊峙가 와전되어
감나무재가 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선국사의 관산덕론기에서 발췌했다는 설명까지 있으니
학문적으로 깊숙이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설명판을 수용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돌아오는 길은 군데군데 싱그러운 초록빛의 차밭이 인상적이다. 녹돈 삼겹살로 간단히 점심을 마친 후
긴 여정의 피로를 차 속에 파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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