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호남정맥산행기

호남 9(입석리-유둔재-북산-무등산-장불재-안양산-둔병재)

만석공원 2009. 9. 21. 21:20

일자 : 2009.9. 20 (무박)

구간 : 입석리-유둔재-북산-무등산-장불재-안양산-둔병재

실거리 32.0 Km  (누적거리 : 233.8 Km ) : 방축마을-입석리 비참여(30.5Km)

시간 : 11시간  

 

 날씨는 가을을 향해 깊이 달려가는 듯 한 낮의 따가운 햇볕에도 아침 저녁은 반팔이 부담스럽다.

 

최근의 한달정도는 10시간 이상의 산행을 하지 않아 비교적 부담감없이 지나갔는데 13시간이라 공지된 32Km의 장거리 산행이 약간 부담스러운 마음을 갖게 만든다. 호남 정맥을 진행하면서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힘든 만큼 고개가 많아 원하는 곳에 버스를 대기시켜 놓고 중간 보급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무거운 짐은 일단 버스에 놓고 떠날 수 있으니 몸이 그만큼 가벼워져서 산행길이 한결 수월해진다. 편안한 산행 때문인가 체중은 좀처럼 줄어들 지 모르고 요즘은 오히려 늘고 있는 듯한 모습에 애꿎은 체중계만 들춰 본다.

 

도시락과 후반기에 쓸 물을 버스에 대기시켜 놓기로 하고 지고 갈 물건은 차가운 새벽 바람을 막아 줄 자켓 한벌 넣고 마실 물 1리터에 간식용 과일만 넣으니 배낭이 한결 가볍다. 저녁을 먹은 후 배낭과 가방을 들고 사당역으로 향한다. 직원 딸 결혼으로 대전에 예식장을 가기 위해 한차례 빠졌음에도 격주로 진행하는 호남정맥에 8월의 마지막주는 산행이 없었으니 다섯주 만에 합류한 형상이라 오랜 만에 보는 산님들의 모습이 반갑다.

 

 11시에 출발한 버스는 내려가는 길이 길어 제법 한숨은 잘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을 주고 새벽 1시 40분이 되어 백양사 휴게소에 도착해서 휴식시간을 갖는다. 버스가 기다리는 중간 보급기지까지 아침 산행이 6시간은 될 것이라는 말에 간식으로만 해결하기에는 체력 소모가 클 것 같아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아도 우동 한그릇으로 든든하게 뱃 속을 채운후 버스는 창평IC를 빠져 나가 새벽 2시 47분에 들머리인 입석리 고개에 닿는다. 범죄없는마을이라는 표지석은 보기만 해도 이 마을이 살기 좋고 인심 좋은 마을이라는 것을 대변해 주는 모습으로 한 밤의 산꾼을 반기고 있다. 

 

팔월 초하루 달은 이미 초저녁에 서산 너머로 떨어졌을 것이고 밤하늘은 서늘한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별빛만이 빈틈 하나 없이 초롱초롱 박혀 쏟아져 내리고 있다. 새벽 3시 북두칠성의 국자가 이미 누워가는 모습을 보니 시간은 이미 새벽으로 흘렀음을 알려 주는 가운데 마루금까지 올라온 논둑을 따라 들어가다 오른쪽으로 붙어 산 속으로 정맥길을 이어 간다.

 

산길은 새벽 이슬이 내려 흠뻑 젖었다. 긴소매를 입었음에도 등으로 흐르는 땀은 불어대는 새벽의 가을 바람에 시원스런 느낌으로 피부에 와 닿는다. 조금만 쉬어도 금방 체온이 떨어지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리 거친 호흡도 없이 판때기 하나 허술하게 걸려 있는 국수봉을 3시 28분에 지난다.

 

맑은 하늘에 정맥길 답지 않은 야경이다. 오른쪽으로는 커다란 도시처럼 저 멀리까지 밤의 불빛이 펼쳐져 있고 왼쪽은 울창한 참나무 숲에 가려 있는데다가 마을도 펼져져 있지 않은 듯 캄캄한 모습을 보인다. 새벽공기의 차가움이 발걸음을 더 빠르게 만드는 듯 바삐 능선을 따라 3시 56분에는 능선까지 올려쳐진 왼쪽의 흑염소 농장의 철망 울타리를 따라 흘러가다가 4시 39분에는 농로를 확장한 듯 중앙선도 없는 단차선의 포장도로인 노가리재에 내린다.

 

고갯길 너머 정면으로 보이는 삼태성의 오리온 별자리를 보니 산행 방향은 서쪽으로 가고 있음을 짐작하면서  외롭게 서 있는 낙석위험표지판을 뒤로 하고 능선으로 다시 흘러 들어간 길은 커다란 올림의 고통이 없이 5시 8분에는 장원봉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 5시 14분에 소쇄원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는데 산위에 설치한 김인후의 시 한편의 해설이 발목을 잡는다.

 

石逕攀危(석경반위) : 위험한 돌길을 더위잡아 오르며

 

一逕連三益(일경연삼익) : 하나의 돌길에도 삼익우가 연이었고

攀閒不見危(반한불견위) : 오르는데 익숙해서 위험은 없어

塵蹝元自絶(진사원자절) : 속세의 발걸음 스스로 끊고 나니

苔色踐還滋(태색천환자) : 이끼의 색깔은 밟을수록 더욱 풍선해

 
어려운 시를 해설까지 어렵게 해 놓았다.
 
조광조의 제자로 조광조가 기묘사화에 해를 입자 함께 유배가되어 벼슬을 버리고 이 곳으로 낙향하여 이 골짜기 아래에 소쇄원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던 양산보와 교우하며 지내던 김인후가 지은 이 시를 제대로 음미하기란 쉽지가 않다.
 

중앙 권력에서의 치열한 권력 다툼과 정쟁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사화가 일어나고 붕당이 결성되어 편이 갈리기를 반복하는 때에 유배가 되면 이 곳으로 내려와서 잠시 쉬다가 자신의 정파가 권력을 잡으면 다시 올라가 반대파를 숙청하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하던 때였다.

 

이 곳의 경치를 배경으로 송강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우리나라 가사 문학이 꽃을 피운 문학의 중심지라고 하지만 그 안쪽의 내면에는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나 권력을 향한 향수와 함께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욕망이 그림자로 숨어 들었음을 바라 본다. 국문학적인 면에서는 가사 문학을 정치적 측면에서 소쇄원 뒷산을 오르며 김인후가 음미한 '산길의 정취는 바윗길을 잡고 오르는 어려움도 세가지의 친구가 있으니 어렵지 않다'고 했으나 그대로 해석하면 '매화,대나무,돌이 있으니 익숙하여 위험하지 않다'고 한 것이 되니 해석이 어렵기만 하고 도무지 그 속 뜻을 알 수가 없다.

 

이 시를 당시에 이 곳에서 중앙 진출을 꾀하며 함께 교우하던 양산보,김인후,기대승과 그 제자들인 정철,고경명 등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과 연결지어 보면 오히려 쉽게 해석될 듯 싶다. '험한 세상을 살아감에도 정직하고,믿음이 가고,식견이 풍부한 친구들이 곁에 있으니 세상살이가 힘들지 않다네. 관직을 버리고 이 곳에 들어와 거닐며 더욱 풍성한 색이 되도록 내 수양에만 몰두한다네' 이 정도의 은유적 표현이라 해야 마땅할 듯 싶다.

 

어려운 싯구를 계속 되뇌이며 능선을 타고 흐른 길은 5시 20분 최고봉이라 표기된 무명봉을 지나며 하늘의 별빛이 점차 빛을 잃어가며 여명이 밝아 오는 모습을 보인다. 상수리 나뭇잎 사이로 왼쪽 산 너머로 점차 환해지던 하늘은 아침 6시 39분이 되어 능선 위로 햇볕을 쏟아 내기 시작하고 한 차례의 땀흘림으로 너울을 넘어 복숭아 과일 간식과 함께 휴식을 취한 후 부드러운 산책길을 따라 흘러 내려 7시 17분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유둔재 2차선 고갯 마루에 닿는다.

 

선두는 이미 식사가 끝나고 출발 준비중이다. 버스에 실어 놓은 도시락을 내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장거리 준비를 위해 물 2리터와 과일 그리고 매실 한병을 배낭에 채워 넣은 후 무등산 방향으로 7시 40분에 들머리를 접어 든다. 20여분을 오른 길은 무등산의 방향과는 반대방향인 좌측으로 틀어 급경사를 내렸다가 다시 올라 채서 숨이 제법 가빠진 연후에 삼각점이 있는 447봉을 8시 21분에 지나며 오른쪽 무등산 방향으로 머리를 튼다.

 

저멀리 눈 앞을 가릴만큼 우뚝 선 무등산은 멀기만 한데 8시 29분에 49번 고압선 철탑을 지나 한차례의 커다란 너울을 넘어 급경사길을 정신없이 흘러 내려 8시 56분 백남정재에 닿는다. 아침 식사 후 출발하여 4차례의 심한 오르내림으로 산을 넘었지만 아직도 무등산은 손에 잡히지 않고 하늘도 보이지 않는 급경사의 숲 속으로 마루금을 끌고 들어 간다.

 

잡목으로 오르막길을 시작한 정맥길은 10미터가 넘는 낙엽송 숲 사이로 급경사를 한없이 끌고 올라가는데 한걸음 한걸음에 휴식없는 진행 때문인지 피로감으로 다리가 무거워진다. 잠시 중턱에 앉아 숨을 돌린 후 밟아 올려 능선 위에 올라 평바위에 잠시 빨래처럼 널부러진다.

 

혼자 진행하는 산행은 이런 면이 좋다.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고, 페이스 조절이 쉽게 되니 장거리 산행에도 한결 피곤함을 줄일 수 있어 좋다. 산 길을 잃어 엉뚱한 알바만 하지 않는다면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느낌도 가지면서 산행의 즐거움은 표현할 수 없을만큼 커진다.

 

마루금은 잠시 능선을 흐르다가 우측으로 바짝 꺽어 완경사를 타고 내리다가 9시 42분 무등산이 왼쪽 눈 앞에  웅장한 모습으로 바짝 다가선 가운데 억새밭 평전을 가로질러 북산을 향해 또 한차례 되비알을 차고 올라 10시에 통신기지 안테나가 있는 북산 위에 닿는다.

 

구름 한 점 없는 오전의 가을 햇볕이 따갑게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신선대 억새밭 평전을 달궈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잠시 소나무 그늘에 앉아 사과 반쪽의 간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훤하게 펼쳐진 가을 야생화와 억새가 춤추는 풀밭 평전 능선을 지나 10시 26분 일반 산객들이 오가는 주요 산행로인 신선대 억새 평전의 갈림길에 올라 지나온 억새 평전의 아름다움에 잠시 도취해 본다. 무등산의 정상은 군사 보호지역으로 접근할 수가 없어 등산로는 무등산의 8부 능선을 타고 허리를 감고 왼쪽으로 흘러 돌아 간다.

 

돌길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커다라 너울없이 편안한 길로 만들어진 등산로를 따라 11시 8분에 규봉암에 도착한다. 멀리서 보기에는 육산으로 부드러운 묘소 모양을 갖춘 무등산은 가까이에서 보면 돌로 만들어져 있다. 육산이라 할 수도 없고 돌산이라 할 수도 없는 묘한 조화의 모습을 보인다.

 

무등산의 깍아지른 바위 밑에 감춰진 규봉암은 포크레인 소리가 요란한 것이 절을 중창하는 모양이다. 대웅전을 지나 스님들이 기거하는 뒷곁으로 돌아 들어가 물을 채우고 시원하게 머리를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바위 절벽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규봉암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바위 곳곳에는 조선시대에 이 곳을 지나간 관리들이 자신의 이름을 벽면에 새겨 놓았지만 머릿 속에 기억될만한 인물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헛된 이름에 매달린 공명만을 찾는 소인배 관리들에 대한 측은한 생각과 아름다운 자연을 생각없이 훼손시켜 놓은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한 채로 너덜 바위길을 지나 12시에 장불재 고갯마루에 닿는다.

 

 입석대와 서석대가 무등산 마루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정맥길이 아니니 장불재 고갯마루에서 무등산 정상을 배경으로 증명사진만 남긴 후 반대편 백마능선으로 방향을 튼다.

 

장불재 고갯마루에서 아스라이 멀지만 한 눈으로 들어오는 광주 시내는 한 폭의 그림이다.

 

1980년 그해의 봄은 몹시 어수선했다. 지난 해 20여년의 독재 통치를 하던 박통이 비서실장인 김재규에 의해서 피살되고 난 후 국가를 움직이는 권력의 방향은 숨가쁘게 변했다. 이제는 민주주의의 시대가 오나 했던 국민들의 열망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또 다시 허수아비 최규하 신현확을 앞에 세운 전두환 군부가 권력을 움켜 쥐었고 젊은 지성들은 도저히 이를 용납할 수 없어 모두 거리로 나왔다.

 

4월 내내 계속되는 시위로 학교 공부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고 거리로 모두 몰려 나가고 급기야 서울역 남대문과 시청앞을 점거하고 태평로 일대는 민주화를 외치는 젊은 지성들로 매일 같이 가득 찼다. 중간고사도 앞당겨 치르더니 정부는 5월 10일 휴교령을 내리고 학교 정문에는 장갑차 두대와 군인 수십명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출입을 막았다.

 

서울은 잠잠해졌지만 이 곳 광주의 피끓는 민주에 대한 열망은 5월 18일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분연히 일어서 군부의 총칼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시민군을 조직하여 저항했다. 결국 강제 진압으로 꽃다운 젊은이들 수백명이 안타깝게 저세상으로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족적이 오늘날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이라도 더 나갈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를 숙인다.

 

합리적이고 계약 중심의 사회인 서구와는 반대로 공자의 유교 통치 이념인 무조건적인 충효를 강조하는 봉건 군주사회에서 넘어와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가 일천한 우리가 몇십년 만에 몇 천년 역사의 서구적 민주주의를 따라 잡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체가 어쩌면 무리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직도 가야할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는 요원하고 우리 모두의 공공의 적이었던 친일파조차 청산을 하지 못한 채 그들과 그들의 후손이 사회 지배 계층을 형성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의 울타리를 강화해 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살아가고 있다.

 

민초들은 자신의 눈 앞에 놓여진 작은 이익에 휘말려 양심을 팔아 민주주의의 소중한 한표를 던져 버리고 왕정인 조선시대도 그러했듯이 권력의 자리에 앉으려는 모든 사람들은 나라의 법을 위반을 했어도 용서가 되고 자신의 영혼을 팔아 민주주의를 포기한 민초들은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공공의 장소에서 주장하기도 매우 조심스러운 세상이 되었다.

 

겉보기에는 민주주의이고 내부적으로 보면 왕과 귀족, 영주와 기사 그리고 농노들로 이루어진 봉건 사회로 회귀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닌 듯 소중한 민주주의 한표에 영혼을 판 민초들은 자신만큼이라도 농노 계층에 들어 있을 수는 없다고 신분의 상승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혼 힘을 쏟아 자녀 교육에 쏟아 부어 넣고 있지만 이미 세상은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세상으로 점차 굳어지는 양상으로 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자신이 모아 놓은 꿀을 모두 빼앗기고 값싼 흙설탕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고 마당 한 켠에 던져 놓은 고무다라에 남은 흙설탕물 한방울이라도 아귀다툼하며 달라 붙어 빨아 대던 늦가을 꿀벌의 모습이 떠 오른다. 이 겨울에도 꿀벌들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모두 빼앗기고 주인이 던져준 값싼 당분에 감사하며 겨울을 지낼 것이다.

 

어리석은 민초들과 꿀벌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광주 시민들의 깨어 있는 정신에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저리는 느낌을 가져 본다. 

 

오곡을 익혀내는 한낮의 가을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가운데 얕으막한 싸리와 진달래만 있을 뿐 제대로 된 그늘 한 곳 없는 백마능선을 따라 흘러 12시 50분 암봉을 지나 오후 1시에 암봉 삼거리 안부 그늘 벤취에서 잠시 등산화를 벗고 누워 여우잠의 휴식 시간을 갖는다.

 

시원한 가을 산들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문득 일어나 다시 산행 채비를 갖춘다. 무거워지던 발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음을 느끼며 진달래 싸리 잡목 사이로 난 마루금을 헤쳐 부드러운 산길을 따라 올라  1시 22분 안양산정상석을 잡는다.

 

멀리 뒤로는 지나온 백마능선과 무등산이 보이고 앞으로 흘러나갈 화순의 마루금이 발 아래 굽이굽이 물결쳐 있다. 아쉬움으로 한장의 증명을 카메라 안으로 밀어 넣은 후 급경사의 발길을 계속 짚어 내려 조선시대에 군사가 주둔했던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는 둔병재 고갯마루에서 오늘의 마루금 답사 발길을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