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 2009.7.19 (무박)
구간 : 추령-장군봉-내장산신선봉-상왕봉-감상굴재
실거리 18 Km (누적거리 : 120.2 Km )
시간 : 8시간 20분
비가 내린다.
내려도 그냥 내리는 것이 아니고 퍼붓는다
대개 6월 하순에서 시작하는 장마는 7월 중순이면 끝나는데 예년과는 달리 북태평양 고기압의 발달이 늦은 것인지 오호츠크해 기단의 세력이 큰 것인지 장마 전선은 며칠째 나라를 위아래로 다니며 흔들고 있다. 기후가 점차 변해간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산업화가 되면서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이 많아 지구의 기후가 변해간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도 아열대 이야기가 나온지가 꽤 되었고 이제는 장마가 아닌 필리핀 태국 베트남 같은 남쪽나라 처럼 우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는 시대가 오는 듯 하다.
산업화로 인해 수십년간 눈에 띄게 많은 것이 달라졌다. 온 나라가 아파트 숲으로 변한지 20여년이 되어 어릴 적 집집마다 처마 밑에 둥지를 틀던 그 흔하던 제비는 산행 중에도 본 일이 없으니 아이들 그림책에서 보는 새로 변해 간다. 미꾸라지 우렁이 등의 흔하디 흔한 고기는 물론이고 산길을 걸으면서 풍뎅이 사슴벌레를 본 적도 없고 이제는 천연기념물이 되어 버린 장수 하늘소 한번 본 것이 전부이니 산 속에서는 모기 깔따구 등의 날파리만 득실거리는 형상이다. 생활의 편의라는 이름으로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은 산업화는 지나는 길마다 새로 짓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온 산은 파헤쳐지고 길을 내고 터널을 뚫고 우리가 자초하는 재앙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먼 훗날 후손들에게 지금의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각인될 지 심히 걱정스러울 뿐이다.
오후 들어 소강 상태를 보인 비가 남쪽으로 장마전선이 이동한 것이라니 새로 준비한 기다란 스패치로 비가림 준비는 하지만 등산화가 비가 새는 것을 알고 있기에 크게 소용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체의 축축함을 줄이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등산화를 수리하거나 새로 사야 하는데 대간을 종주한 등산화라 정이 들어 밑창이 다 닳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이런 비 오는 날의 산행을 힘들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낮에 몸풀이로 삼성산 국기봉을 돌아 내려와 짜장면으로 점심을 먹은 것이 문제가 생긴 듯 오후 내내 진땀과 함께 힘이 쭉 빠져 나가더니 저녁 때 3남매 집안 식구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모여 돼지갈비로 저녁 식사를 할 때도 고기 몇점 먹지 못하고 속이 불편했다. 소주 두병으로 군생활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효민이와 몇잔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원래 즐기지 않는 술에 체력은 더 떨어져 몸이 불편해 일찌감치 들어와 산행을 위해 쉬지만 체력이 평소 출력의 50%도 되지 않는 생각이 들며 이번 산행은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해 본다.
두어시간 쉰 다음 혼자 꾸역꾸역 준비를 해서 사당동으로 출발했지만 비 오는 날이라고 점심도 안가져 가고 선식 매실 등 산행시 필수적으로 체력 보충을 위해 가지고 가던 품목조차 빠뜨리고 출발했다. 몸이 편치 않으니 기본적으로 챙기던 물건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미 버스에 오른 뒤에 알아 차렸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사당동에서 김밥 두줄을 사서 해결하기로 하고 사당에 도착해 함께 하는 산님들과 인사를 나눈다.
버스가 두대로 나뉘어 갈 정도로 성황을 이루던 호남정맥은 어느 새 한 차로 줄었고 이번 산행은 여름 물폭탄 산행이니 한 차도 채우지 못한 33명으로 산행 인원이 줄었다. 날씨 좋고 경치 좋은 날 구경하는 산행을 마다 않고 오신 산님들은 나처럼 색다른 경험을 가져 보겠다는 의지가 강한 분들일 것이다.
모처럼 예정시간에 맞추어 11시 정각에 차는 출발하고 매번 쉬어가는 휴게소에서 또 머물지만 다른 때는 먹던 휴게소 라면도 먹지 않고 새벽 산행을 위해 김밥 두세개를 꺼내 입에 물지만 입맛이 깔깔하니 몸이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 빗줄기는 차창 밖으로 굵어지는 가운데 내장산 추령 고갯마루 주차장에 도착하여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를 기다려 보려는 듯 백두 대장님은 잠시 차내에 머물 것을 주문하지만 하늘은 좀처럼 빗줄기를 줄여 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바짝 내려와 이렇게 빗줄기가 굵을 것이니 산 위로 오르면 구룸 속에 조망은 좋지 않아도 빗줄기는 가랑비 정도로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비가림 차림을 한 후 버스에서 내려 새벽 3시 10분 주차장 끝 들머리를 따라 내장산 능선을 향해 숲 속으로 랜턴을 비추기 시작한다.
급경사가 아닌 길은 그다지 힘들지는 않은데 산길은 물길이 되어 냇물처럼 흐르고 이리저리 좌우로 피하며 발을 딛지만 물이 들어 오는 것은 시간 문제에 불과하니 뻔히 등산화가 새는 것을 알면서도 다만 몇시간이라도 버티어 주기를 바라는 터무니 없는 기대를 하는 내 마음의 이중성을 들여다 본다.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퍼붓는 물줄기를 뚫고 앞서 간 산님의 랜턴 불 빛만 바라보며 간다. 길을 오르다 오른쪽으로 꺽여 능선으로 타는 길이 있어 보이는데도 앞의 산님이 그대로 직진하고 있어 오른쪽은 작은 전망바위인가 판단을 하고 일단 어둠 속이니 의심을 접고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앞을 따른다. 잠시 후 묘소 윗쪽을 지나 몇분을 지나자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좌측으로 가면 산림박물관이고 우측으로 가면 산책로라 되어 있으니 느낌으로라도 우측으로 가는 것이 정상이다. 산님들과 잠시 서성이다가 빗속에 GPS를 바라보는 구봉님 말에 힘을 입어 우측으로 향한다. 산책로라 그런지 폭이 1미터는 될듯 비교적 넓다. 넓은 길을 몇분을 더 가다가 산책로 갈림길 이정표가 또 나온다. 좌측으로는 산책로 내리막길이고 우측으로 서서히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잠시 더 가다가 구봉님이 길이 틀렸다며 멈춰 폭우 속에 GPS를 보다가 길을 되돌린다.
오던 길을 되돌아 다시 추령 쪽으로 향하며 GPS를 바라 보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은 아까 처음에 본 갈림길이 맞을거라 생각하면서 바짝 뒤따라 붙어 흐르다가 바로 그 갈림길로 올라서서 능선으로 길이 이어질 느낌으로 이 능선 바위를 지나 길이 있는 것 아닐까요 하며 물었지만 구봉님은 GPS를 보며 그 쪽은 길이 아닐 것이라 말하며 돌아선다. 차라리 GPS가 없었다면 그냥 고집과 느낌으로 길을 진행했을텐데 GPS가 길이 아니라는데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서 출발점인 추령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는데 거기까지 오기에는 갈림길이 없었다고 얘기하려는 순간 뒷쪽을 따르던 셈틀님이 GPS가 동작했는지 길이 아니라며 일행을 다시 되돌린다.
다시 처음 왔던 길을 되짚어 셈틀님을 따라 움직인다. 오렌지님이 중간에 질문을 던져 놓는다. 우리가 맨 마지막이 아닌데 맨뒤에 올라와야 하는 백두님을 우리가 왜 중간에 만나지 못했느냐고 우리 길이 틀린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내가 대답했다. 아까 중간에 올라섰던 능선길이 제대로 된 길인 듯 하다고 우리가 돌아가는 사이 후미는 중간에 빠져서 능선을 통해 흘러갔고 우리는 옆으로 해서 능선길을 찾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처음 왔던 곳을 지나 오르던 길은 이 내 끝나고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입산 금지 표지 뒷 쪽으로 잠시 오르자 오른쪽에서 올라오는 정맥 마루금의 모습이 보인다. 길이 합쳐지니 이제 전체 잘못되었던 길의 정확한 윤곽이 머릿 속에 잡혀진다.
혼자 산행을 할지라도 정확한 머릿 속에 좌표로 거의 길을 잃는 일이 없는데도 느닷없이 폭우 속에서 예상치도 못한 알바로 30분을 허비했다. 몸도 완전히 복구되지 않아 오늘 산행에 천천히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알바까지 하고 나니 마음만 조급해진다. 후미를 보는 백두님이 벌써 멀리까지 간 모양이다 앞에 랜턴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후미가 된 산님들과 나도 약간의 초조감이 더해진 탓인지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한번도 가본적 없는 산길.. 그것은 어찌 보면 인생길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잘못된 길을 가다가 알았을 때는 너무 많이 지치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고 아니 심한 경우에는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일까지 생기고..중간중간에 앞을 내다 보고 지도로 점검도 해 보지만 이정표도 없고 먼저 간 사람들의 자취도 없는 산길에 캄캄한 밤이고 비라도 내릴라치면 그만큼 막막한 때가 없는 듯 하다.
오늘 이 산길의 실수처럼 인생을 살면서 잘못된 결정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오늘 산길의 잘못된 결정은 날씨의 탓으로 돌리지만 내 인생의 잘못되었던 결정은 누구의 탓일까. 산행길은 길이 잘못 되어도 약간의 수고로 다시 되돌아 길을 바로 잡을 수 있거나 실수를 막는 학습 효과가 있다지만 인생의 길은 되돌릴 수도 없으니 혼자 상처의 흔적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늦은 시간을 복구하려는 마음까지 합쳐 발을 빠르게 움직여 옛날에 만들어 놓은듯한 건설부의 국립공원 시멘트 표식이 있는 첫번째 봉우리에 올라 빗 속에 긴 숨을 토해 놓고 완만한 출렁거림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길을 이어 4시 30분에 유군치를 지난다. 비는 쏟아지고 카메라 꺼낼 생각도 들지 않는데 승병이 임진왜란 때 왜군을 이 곳으로 유인해 커다란 승리를 거두어 이름이 지어졌다고 쓰여진 표지판 앞에서 감상의 여유를 보이기란 쉽지 않다. 왜군을 유인해 승리를 거두었으면 유군(誘軍)이 되어야 할텐데 머문다는 뜻의 유군(留軍)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가파르게 변해가는 오르막을 향해 발을 딛는다.
길은 빗물로 도랑이 되어 흐르는 오르막길의 허덕임 속에서 주변은 어슴프레 밝아 와도 새벽을 알리는 새소리조차 숨을 죽이고 상수리를 때리는 빗줄기 소리만 요란스럽다. 쏟아진 비는 거침없이 골짜기를 흘러 내리는 듯 빗소리인지 폭소소리인지 분간도 하지 못할 물소리만이 귓 속을 채우는 가운데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장군봉에 5시에 도착한다. 희묵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여 이름 지어졌다는 표지판이 있는 장군봉에서 비를 맞으며 멈추어 서서 가쁜 숨을 진정시킨다.
임진왜란의 싸움은 칼을 든 어린아이와 총을 든 어른의 싸움이었다. 나라 안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관리들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파벌의 권력 유지를 통한 부귀영화의 탐욕만이 가득 차 있었고 실질적 소득없는 성리학 이론과 해석이 누가 맞는가로 국론만 분열되고 있을 때 일본은 몇십년 전에 일본을 방문한 포루투칼 상인들로부터 조총 기술을 전수 받아 수십년의 혹독한 내전을 거치면서 무기기술과 전투기술이 완벽히 갖추어진 상태에서 통일을 이룬 토요토미가 내부 결속을 위해 외부로 눈을 돌려 조선을 침공한 일이니 그 싸움의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전쟁을 끝내는데는 이순신장군과 권율 장군을 비롯한 각 지방의 의병과 명나라 지원군 등의 역할도 컸지만 무엇보다 토요토미의 죽음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 가장 큰 직접적인 요인일 듯 싶다. 해상에서는 물흐름에 익숙하고 조총을 무력화시키는 전술무기인 거북선을 가진 이순신을 왜군들이 당할 방법이 없었겠지만 육지에서는 총을 가진 자와 칼을 가진 자가 싸움이 될 턱이 없으니 우리의 대항은 완전히 정신력만을 내세운 무모함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전쟁의 수행방법과 병법에 이미 익숙해 있는 왜의 주력군이 자신이 싸움을 하기에 훨씬 유리한 넓고 편한 곳을 두고 이 산 위로 올라왔을리는 없을 것이고 게릴라전으로 일부 왜군을 유인을 해 산 속으로 들어왔다가 지형지물에 어두웠던 왜군을 매복해 있던 승병들이 기습하는 형태의 전투를 벌인 듯 하다.
고도를 올려도 굵은 빗줄기는 줄어 들지 않고 날이 밝아 랜턴을 끄고 주변을 둘러 보려 하지만 운무와 빗줄기에 내 몸 하나 추스리기도 급급하다. 가쁜 숨이 진정되자 이미 물이 가득 차게 젖은 등산화로 앞으로 긴시간 산행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앞서는데 어제부터 체력이 저하된 몸이 도무지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 따라온 것도 몹시 벅차게 힘들다. 날도 밝았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고 이제 여유로운 모습으로 천천히 산행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체온이 내려가기 시작하자 다시 출발 하면서 맨 뒤에 천천히 따라 붙어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걷는다.
연자봉을 5시 30분에 지나 오른쪽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는 삼거리 합류점을 지나자 길은 내리막길로 내렸다가 가파른 오르막으로 변한 길은 장대비 속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땀으로 온 몸을 적시게 만든 다음에야 아침 6시 내장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고도 763미터의 신선봉에 오른다.
날씨가 좋으면 내장산의 안팎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겠지만 이런 빗 속에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쏟아지는 폭우를 피해 앉아 자두 두개로 갈증을 해결한후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발길은 무겁고 금방 숨이 차오르고 몸이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느새 여산님 지리산님 구봉님과 함께 후미를 형성하면서 열심히 마루금을 따라 발을 옮기지만 오르막만 되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두어차례의 출렁거림으로 까치봉 이정표를 따라 흐르던 마루금은 까치봉을 앞에 두고 바짝 오르막을 만들어 올린 후 까치봉 300미터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리기 시작하면서 내장산을 둘러싼 연봉 능선과 이별을 한다.
약간의 출렁거림으로 고도를 낮춰가면 편한한 길을 주던 마루금은 소죽엄재를 지나면서 두어차례의 된비알 출렁거림을 앞에 놓는다. 체력은 복구되지 않고 온 몸에 기운이 빠져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마루금을 따라 올라 7시 30분 영산기맥이 분기하는 무명봉에 앉아 빗 속에 자두 2개를 먹으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마루금 산행을 되짚는다.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동진강과 영산강과 섬진강으로 갈라 흘러간다. 한날 한시에 같은 곳에 있었어도 함께 하지 못하고 갈라진 흐름은 영원한 이별의 줄기를 만들어 낸다. 살아가다 보면 인연이 있으면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지만 뒤돌아 보면 만날 것을 기약하며 떠나갔던 많은 사람들이 내 머릿 속에서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이 이 물줄기처럼 영원한 이별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간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떠난자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회자정리 (會者定離)거자필반 (去者必反)의 불가의 말은 어쩌면 사부대중에 대한 위로의 말이 아닐까 싶다. 소중하다. 만남도 소중하고 이별도 소중하다.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이별을 하는 사람 모두가 단 한번의 내 모습이 그들에게 투영되는 것으로 내가 그들에게 각인되어 영원한 모습으로 남을 수도 있음이니 단 한번을 만나고 그 한번으로 영원한 이별이 될지라도 모든 사람의 만남과 이별은 더없이 소중한 마음으로 다가서야 할 일이다.
후미에서 오른쪽으로는 영산강 왼쪽으로는 섬진강을 만들어 내는 마루금을 따라 내려 오니 순창새재 안부에 먼저 내려온 산님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함께 앉아 어제 저녁에 산 김밥을 꺼내 먹어 보지만 이미 맛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산행을 위해서 굶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버스를 세워 놓은 감상굴재까지만 가면 라면도 있고 중간 보급이 가능하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몸은 안풀려 힘들지만 이 정도면 발바닥에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끝까지 가도 후미로라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김밥 몇개를 입에 넣고 자두 두어개를 먹는 것으로 빗속에 아침식사를 마무리 한다.
이정표가 매우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분명히 까치봉을 오른쪽 300미터에 두고 좌로 틀어 한시간이 넘도록 걸어 여기를 왔으니 까치봉은 내 뒷쪽으로 오른쪽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정표는 왼쪽 아래 계곡 방향으로 내리는 길을 가리키며 까치봉이라 안내하고 있다. 머릿 속에 그려진 도면이 혼란스러워 내장산 안내판을 찬찬히 살펴 보니 영산기맥 분기점 봉우리를 지나지 않고 우회를 해서 까치봉으로 가는 산행로 이정표의 모습이라 방향 표시가 그렇게 되어 있다.
세상 살면서 나 혼자만의 경험으로 방향을 잡은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선인들이 맞다고 가르쳐 놓은 분명한 인생의 방향이 있음에도 나 혼자의 생각으로 내 갈 길을 간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세월만 버린 시간은 또 얼마인가. 아쉬었던 지난 세월에 대한 여운이 빗물에 씻겨 흘러 내린다.
오전 8시 10분 맨 마지막에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나 천천히 상왕봉을 향한 오르막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심하지는 않아도 꾸준하게 오르막을 만들어 놓는 길은 일반 산객이 찾는 등산로를 벗어난 탓인가 길이 그다지 좋지 않다. 산죽으로 뒤덮여 앞길을 막으니 헤쳐 가며 고도를 높여가던 길은 한차례의 큼지막한 출렁거림을 넘어 내렸다가 온 몸을 땀으로 젖게 만들어 놓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길게 만들어 체력을 소모시켜 놓은 후 8시 50분에 상왕봉 표지목을 앞에 세워 놓는다. 언제나 올라갈까 슬금슬금 바라보던 고도계는 집에서 분명히 맞춰 왔는데도 이곳이 741미터라 표시하는데도 내 고도계는 700을 가리킨다. 기압의 급격한 변화로 고도계 편차도 많이 난다. 그렇지만 앞산의 거리와 이렇듯 길게 올라갈 때는 이따금 고도계를 보는 것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알게 해 주므로 체력 안배와 함께 산행 위치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키는데는 더없이 좋다.
상왕봉은 생각없이 움직이다가는 표지목을 지나 그대로 직진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라오는 각도와 봉우리에서 좌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는 각도가 예리하기 때문에 생각없이 표지목을 잡는 경우에는 길도 좋으니 그대로 직진하여 백양사로 내리는 골짜기로 향할 듯 싶다.
잠시 가늘어진 빗줄기를 틈타 증명사진을 남긴 후 이제 전라북도 정읍을 이별하고 뒤로 돌아 오른발에 전남 장성군 왼발에는 장수군을 걸치고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내린다. 도집봉을 지나는 바위 위에 홀로 풍상을 격고 살아가는 소나무의 모습이 운무 속에 잔잔한 감동으로 들어 온다. 낙락장송..이처럼 홀로 풍상을 겪으며 살아가는 소나무에 빗대어 절개를 굽히지 않고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을 비유하며 쓰일 때가 많은 말이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 하리라.
조카 단종을 폐위시켜 영월 산간벽지로 유배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인정하지 못하던 많은 집현전 학자들 중 한사람이었던 성삼문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적발되어 삼족의 멸문지화를 당한다. 수십년간 기술의 발전과 학문의 발전이 두드러졌던 세종 시절을 거쳐 온 이들과 학구파이던 세종을 이은 문종이 2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단종을 모시며 세상을 이끌어 가려 했는데 느닷없이 어려서부터 공부에는 관심없고 약간은 거친 성격이었던 수양대군이 조카를 몰아내고 왕으로 자칭하니 세종을 곁에서 모시며 곁에서 생활을 해 온 성삼문 같은 사람이 새로운 왕으로 세조를 받아들이기란 사실상 어렵게 되어 있었다. 굳이 커다란 절개가 아니더라도 인간적인 양심이 한 쪽 구석만이라도 남아 있다면 옛 주인 세종의 은혜는 저버릴 수 없게 될테니 당연히 단종 복위를 위해 움직일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모반으로 국문을 받을 때 지어진 시라고 많은 책에서는 기술되고 있지만 고문을 당하는 자리에서 이런 정신적 여유를 가지고 시조를 읊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보다는 복위를 결심하고 다른 동지들과 모여 거사를 의논할 때 술자리에서 자신의 심경의 굳음을 피력하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위 위의 낙락장송은 성삼문이 말하듯 그렇게 꼿꼿한 모습이 아닌 세월의 풍상 속에 반쯤은 눕혀져 계곡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다.
홍진에 묻힌분네 이내생애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를 미칠가 못미칠가
천지간 남자몸이 날만한이 하건마는
산림에 묻혀있어 지락을 모를것가..
(중략)
엊그제 검은들이 봄빛도 유여할사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 외에 어떤벗이 있사올고
단표 누항에 흩은 혜음 아니하네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한들 어떠하리.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가사문학의 효시라는 이름으로 국어 교과서 안에서 불우헌 정극인을 만났다. 성삼문보다 17살이 많은 정극인은 수재 성삼문이 식년시를 통해 약관의 나이에 관리 생활을 시작하는 때에 아직도 태학에 다니는 만학도로 37살의 나이로 세종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참형을 당할 지경까지 이른 것을 황희 정승의 구명 운동으로 목숨을 건지고 낙향하게 되니 청소년 시절부터 생원시를 통과하고 태학에 들어갔을 때 가졌던 청운의 꿈과 자신이 공부를 하고 세상을 살면서 옳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표현이 참담한 결과가 된 것에 대하여 얼마나 실망이 컸을까 싶다.
고향인 이 곳 정읍으로 낙향하여 조용히 지내던 정극인은 세종이 끝나고 문종이 즉위하자 문과에 급제하여 단종을 거쳐 성삼문이 단종 복위를 꿈꿀 때 새로운 권력의 중심축인 세조 곁에서 늦은 나이에 관리 생활을 하게 된다. 세종이 좋은가 세조가 좋은가에 대한 생각이 무의미한 것처럼 성삼문이나 정극인이나 자신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보답하기 위해 몸을 바쳤을 뿐 각각의 생각에 잘잘못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의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이니 동일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각 개인의 이해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하면 멀리 하고 , 자신과 맞는 사람이라 판단되면 적극적으로 함께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순리가 아닐까 싶다.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닌 생각과 사고의 방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코드의 의미라고 해석하고 싶다.
가사문학의 효시로서 상춘곡을 이야기하지만 봄을 맞이하는 기쁨을 나타내는 한줄 한줄의 행간에는 자신의 호까지 불우헌이라 지은 정극인 자신의 인생이 그려져 있는 듯 하다. 유유자적 하면서도 내면에는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많은 상념들과 봅이 돌아와 반드시 내 인생에 꽃도 피리라는 확신감 그리고 그 봅을 맛보는 여유 모든 것이 상춘곡 속 행간에 녹아 들어 있는 듯 하다. 폭풍우가 심할수록 지나고 나면 하늘이 티없이 맑은 쪽빛 보석이 되듯이 사람도 극한적 고통을 겪은 후에 만들어 놓은 작품이라야 더 진한 감동의 모습으로 다가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노송 한그루는 이 곳 정읍사람 불우헌 정극인의 모습을 투영시켜 내는 듯 눕혀진 구부정한 모습이 되어 지나는 산객을 반긴다. 잠시 운무 속에 소나무를 둘러보고 한장의 사진을 남기지만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운무에 조망은 되지 않고 9시 11분 빗줄기는 또다시 굵어지니 황급한 이별의 인사를 하고 마루금을 따라 길을 내린다.
상왕봉을 지난 뒤로 몸이 가벼워지고 체력이 완전히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거친 암릉을 타고 내리면 발걸음을 빨리하여 출렁거림으로 고도를 내려가면서 백학봉 표지판을 보여주며 흐르던 정맥길은 백학봉 몇백미터 못미쳐 헬기장 마당에서 10시반향 숲으로 마루금을 안내하니 좋은 길을 따라 생각없이 움직이다가는 길을 잘못들기 딱 좋은 곳이다.
싸리나무 잡목을 헤치며 급경사 내리막은 군데군데 밧줄도 없는 암릉으로 빗길에 위험한 모습을 보이는데 다행히 평소에 습기는 없는 능선상의 편마암이므로 등산화의 미끄러짐은 없으니 내려서는 길이 크게 지연되지는 않는다. 9시 27분 출입금지 표지판과 이정표가 서 있는 안부에 도착한다.
왼쪽은 구암사 오른쪽은 백양사 오른편 뒤로는 백학봉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앞으로는 출입금지 표지가 서 있다. 출입금지 표지판 뒤로 지나가는 것이 마루금의 흐름이란 것을 대간길에서 이미 체득되어 알고 있고 능선길도 표지판 뒤로 나 있으니 사진 한장 남긴 후 바로 표지판 뒤를 따라 마루금을 밟는다.
부드러움으로 이어지는 길에 한차례의 자그마한 출렁거림을 넘어가니 앞서 진행하는 산님들이 모여 바위를 조심스레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백두님과 함께 급경사를 내려 선두를 따라가기 위해 내려가는데 고도계는 300미터 밑을 가리키며 정신없이 내려가도 고개가 나오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온다. 이 정도 고도면 고개로 떨어져야 하는데 싶은 생각으로 뒤를 따르다 보니 백양사로 넘는 가로지르는 산길에서 좌측을 타고 나가 내장산 국립공원을 벗어나야 하는데 골짜기로 내리다가 먼저 내려간 선두가 길을 되돌려 오는 모습과 마주친다. 여기도 겨울철 좋은 조망이 아니라면 길을 잘못들기가 딱 좋은 코스다. 마치 마루금을 따라 내려가는 형상으로 보이니 독도에 주의하면서 마루금 형상을 보지 않고는 지금처럼 밑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는 지형이다.
길을 돌아 올려 능선을 가로질러난 소로길을 왼쪽으로 따라 내려 국립공원을 나와 곡두재로 내려 오면서 우마차길의 흔적은 밭을 지나 마을로 흘러 내려가니 이 길도 마루금이 아니다. 마루금 길은 마을로 내려가다가 과수원 사이를 가로질러 백양사로 넘어 가는 비포장 풀밭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100여미터를 간 후에 마루금을 밟아가도 되는데 마루금이 빤히 보이는 길 혼자 갈수도 없고 산님들과 함께 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려 올라 산이 끝나는 지점의 묘소까지 원점 복귀했다. 묘소 주변에서 단체로 10시 10분에 휴식을 취하며 인원 점검을 해보니 전 인원이 산행 중에 한 곳에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 싶다.
휴식을 마친후 묘소 우측 전사면 풀숲으로 뛰어든 정맥길은 이내 과수원 끝머리의 임도로 나갔다가 곧 임도를 버리고 좌측 산으로 접어 들어 마루금을 이어간다. 약하게 오르막을 잡던 길은 급하게 고도를 높이기 시작해서 제법 숨을 가쁘게 만들기 시작한다. 어찌 하다 보니 맨 앞에 섰다. 비는 점점 가늘어 그쳐 가기 시작하는데 비옷을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없이 몸이 달아 올라오기 시작한다. 무명봉을 올라 능선을 따라 돌아가는데 버섯 두송이가 보인다. 언뜻 보이기에 송이 같은데 송이철도 아닌데 송이일리도 없어 줄기를 툭쳐보니 찢어지는 것이 줄기에 벌레 파 먹은 자리도 있으니 이건 분명 먹는 버섯이다. 버섯을 취하여 무슨 버섯인지 알아보겠다고 손에 들고 진행을 한다.(나중에 알아보니 광대 버섯이다.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버리기로 했다. 특별한 버섯도 아닌데 하찮은 일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두어 차례의 후끈한 출렁거림으로 고도를 올리니 온 몸에 땀이 흥건하다. 버섯을 배낭에 넣고 비옷을 벗을까 생각하며 잠시 쉬었는데 또 다시 빗줄기는 굵어진다. 다시 벗었던 우의를 걸쳐입고 능선을 돌아 내리니 멀리 강선 마을이 보이며 버스가 기다리는 모습이 보인다.
강선 마을에서 안쪽 마을로 들어가는 시멘트 도로에서 후미가 내려올 때까지 함께 기다렸다가 길을 가로질러 숲으로 돌아 밭 사이를 지나 11시 30분에 감상굴재가 있는 강선마을에 들어선다. 빗줄기는 다시 굵어지고 마루금을 타고 만든 시멘트 농로는 우측 고추밭으로 간 빗물은 영산강으로 가고 좌측 논으로 흘러든 빗물은 섬진강으로 향해 이별을 하고 있다. 강선마을 도로 오른쪽에 있는 민가에 많은 사람들이 느닷없이 닥쳐 들어 할머니는 몹시 불편해 하시는 모습이다. 결례를 무릅쓰고 할머니 댁 수돗가에서 몸을 씻어 뒤가 개운치 않았는데 총무님이 나중에 용돈을 5천원 드렸다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쌍치로 버스를 이동해 순창 한우로 길게 뒷풀이를 한 후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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