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호남정맥산행기

호남 7(천치재-오정자재-강천산-금성산성-광덕산-방축마을)

만석공원 2009. 8. 17. 23:21

일자 : 2009.8. 2 (무박)

구간 : 천치재-오정자재-강천산-금성산성-광덕산-방축마을

실거리 29.5 Km  (누적거리 : 171.3 Km )

시간 : 11시간 40분

 

입추가 지나고 말복이 지나도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르는 더위와 남도 깊숙히 내려가는 산행의 거리로 인해 출발시간을 한시간 앞당겨 밤 10시로 하니 마음과 몸이 분주하다.

 

낮에는 올 들어 서울 날씨가 최고로 높다는 34도를 올라가는 폭염 속에 다리 운동이라도 할 요량으로 친구들과 수락산을 돌아 내려와 시간까지 마음까지 다급해진다.

 

그다지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지만 효민이와 지리산 비박 산행 이후로 무박 관련 준비물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흩어져 있는지라 랜턴부터 차근차근 찾아 무박 준비를 하고 폭염 속에 장거리 산행을 위해 얼려 놓은 매실 음료와 선식 물까지 3리터를 합쳐 단단히 챙겨 넣는다.

 

다행스럽게 지나가는 오정자재에서 중간 보급기지 운영이 된다 하니 짐의 일부는 버스에 놓고 산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폭염에 장거리라도 한시름의 걱정을 덜어 놓고 사당역의 산님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밤 10시 담양을 향해 떠난다.

 

낮에 한 숨의 낮잠도 청하지 않고 놀면서 유람하는 산행이었지만 그럭저럭 6시간의 산행에 피곤했던지 버스 안에서 비몽사몽 오락가락 하다가 휴게소에서 우동 한그릇으로 뱃 속을 더 채워 놓고 졸고 있는 사이 새벽 1시 40분에 천치재 위에 버스는 멈춘다.

 

다른 때보다 일찍 시작하는 산행 때문인지 차에서 꿈까지 꾸어대며 자던 잠을 털어내기가 더 고역이다.

좌우로 고개를 돌려 털며 일어나 산행 준비를 위해 배낭을 들고 차밖으로 내리니 뒤늦게 올라오는 스물닷새의 그믐달이 우리가 올라갈 산자락에 비스듬히 반기는 모습으로 얼굴을 내민다.

 

새벽 02 :00 비닐 하우스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 마루금을 향해 무더위와 싸우겠다고 달려든 27인 전사들의 랜턴 불빛이 길게 줄을 이어 댄다. 산짐승과 산새들도 깊이 잠든 밤 상수리 나무 사이로 이따금 비치는 그믐달 빛을 이정표 삼아 방향을 틀어대던 마루금은  오른쪽 비석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로 내려 선다.

 

임도를 따라 우측으로 100여미터를 따라가던 길은 오른쪽으로는 특용작물재배로 입산을 금지한다는 나무 둘레에 붙인 표지가 두번째 나타날 때인 2시 20분에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를 버리고 마루금을 향해 올라 간다.

 

특징없이 온 몸의 땀으로 속도를 높이며 올리는 마루금은 봉우리 이름조차 없고 이따금 보이는 달빛으로 볼 때 북동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만을 남겨줄 뿐 싸리와 철쭉 등의 잡목으로 우거진 숲을 헤치며 정신없이 앞사람 발끝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하다.

 

능선을 따라 또 한차례의 거친 호흡으로 이름조차 없는 532봉을 지난 마루금은 달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동남방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 임도를 지나 다시 오르막길로 몇차례의 숨을 거칠게 만들며 새벽 땀을 온 몸에 적시게 만든 다음 3시 14분에 치재산 팻말을 세워 놓은 정상의 헬기장에서 숨을 가다듬는다.

 

발걸음이 정신없이 빠르다.

한밤의 조망이 없는 것은 이미 익숙한 터이고, 낮과는 달리 지도를 가지고 있어도 마루금을 가늠하기 어려워 방향을 잃는 경우에는 혼자서 낙오를 할 수도 있다는 긴장감과 함께 어차피 새벽 2시부터 시작한 산행이라 날이 밝기를 기대하기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어 있어서 선두의 불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모두 바짝 따라 붙어 표준 시간이 2시간으로 그려진 치재산을 1시간 20분만에 올라 온다.

 

돌아 보면 인생도 이와 같이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선인들이 밟아 놓은 발자취라는 지도를 움켜 쥔 채 조심스레 길을 짚어 가지만 인생의 한치 앞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앞서 가는 사람들의 발자취가 가야할 길이 맞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놓치지 않으려 허둥대며 따라 가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지쳐 가고 날이 밝아 바라 보니 내가 살려고 했던 인생은 제대로 이루지도 못하고 어느 덧 황혼길로 접어 들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라도 열두 때, 한 달도 셜흔 날,

져근덧 생각 마라. 이 시람 닛쟈 하니

마암의 매쳐 이셔 骨골髓슈의 깨텨시니,

扁편鵲쟉이 열히 오나, 이 병을 엇디 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다.

찰하리 싀어디여 범나비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데 죡죡 안니다가

향 므든 날애로 님의 오새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라셔도 내 님 조차려 하노라.

 

하루 열두 시각 한달 설흔날을

조금이라도 생각을 덜어 내어 이 시름을 잊어보려 해도

그리움이 마음 속에 맺히고 뼛 속까지 사무쳐 있으니

편작같은 의사가 열명이 온다한들 이 병을 어찌 고칠까 싶다.

아~ 이런 내 병은 이게 다 님의 탓이로구나

차라리 죽었다가 범나비가 되고 싶구나

꽃나무 가지마다 옮겨 날아다니다가

꽃향기 가득 날개에 묻혀 님의 옷에 사뿐히 앉고 싶어라

님이야 나비가 나인줄 모르겠지만 나는 내 님만을 따라 다니고 싶구나

 

남정네에 대한 그리움을 담뿍 담고 있는 노래이지만 사실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충신연주지사로 보는 것이 마땅한 고교 시절 교과서에서 접했던 정철의 사미인곡의 마지막 부분이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한세기 정도는 훈구파를 내치고 사림파가 중앙 관계를 모두 휘어 잡아 가는 가운데 왕의 외척을 중심으로 한 파벌싸움의 절정기였다. 어쩔 수 없이 아무 편에라도 들어야 관복이라도 입어 볼 수 있었던 시절에 파직당한 아버지를 따라 이 곳 담양에 내려와 청년 시절을 보내며 당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며 사단칠정론에 대한 갑론을박을 하던 기대승의 문하에서 고경명등과 함께 수학을 했던 송강 정철은 먼저 과거를 급제한 친구 고경명이 시험관으로 있던 4년 후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서인 계열의 율곡과 두터운 교우 관계를 갖고 중앙 관직 생활을 하지만 외척 세력에 대한 정리 문제를 놓고 대립하던 김효원과 심의겸의 이조정랑 벼슬자리 다툼에서 서인 계열에서 벼슬 생활을 하다 파직 귀양 복귀 등의 반복 생활을 하게 된다.

 

율곡이 세상을 일찌기 떠난 후에 동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고  서인 집권시 인사 문제로 전횡을 휘둘렀다는 탄핵으로 파직된 후 다시 내려온 담양 땅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아낙이 남편을 그리는 마음을 노래하는 것처럼 임금을 그리워하며 이 사미인곡을 지었다.

 

모든 충신연주지사의 노래들이 그렇고 이 나라 땅 곳곳에 있는 국사봉 국망봉이 그렇듯이 사실 임금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고 권력에 대한 향수였을 것이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귀양가고 목이 달아나게 만드는 임금이 뭐가 그리웠겠는가. 임금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을 주무를 수 있는 권력에 대한 향수는 예나 지금이나 그 중심에 있다가 물러난 사람이면 거의 모두가 느끼는 목숨을 내 놓을만한 마약 같은 존재인 모양이다.

 

몇년전 강원도관찰사로 관직에 있을 때 지었던 유유자적하는 자연에 대한 감상을 노래하던 관동별곡과는 판이한 사미인곡을 접하면 자신이 처해 있는 처지에 대한 감정이 극명하게 달라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이미 건국이 후 200여년이 되어 가는 조선은 건국 이념이던 주자의 성리학이 추구하는 안빈낙도는 이미 황희 정승 때 없어지고 권력과 출세를 향해 파벌을 나누어 가며 성현들의 청렴 도덕성에 대한 가르침은 입으로만 외칠 뿐 자신의 파벌, 가문의 축재와 출세만을 위해 붕당을 조직하고 서로 헐뜯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니 우리의 모습을 임진왜란을 준비하던 일본은 어떤 모습으로 보았을까 싶다.

 

당파싸움과 임진왜란 속에서 복귀되었다가 또 파직되기를 반복하다가 강화도에서 58세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 송강은 청렴 강직하여 융통성이 없어 적을 만들어 스스로 곤경에 자주 처했다고 전해지면서도 말년으로 가면서는 파직의 원인이 주색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에서 유성룡이 주축이 되어 있는 동인들에게 논공 행상에서 밀려나는 말년으로 가면서 송강도 인생에 대하여 스스로 회의를 느꼈던가 아니면 자신의 가치관의 변화가 있지 않았다 싶다. 어찌되었던 끝없는 부침에서도 권력의 중심에서 오락가락하며 어려운 국난의 시기에 관리 생활을 했던 모습에서 관리로서의 능력보다는 뛰어난 감성으로 다듬어진 좋은 글들을 후세에 전한 시인의 모습으로 우리의 가슴 속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잠시 내리던 길은 3시 30분 정광사로 들어가는 임도로 내려 임도를 잠시 걸어 내리다가 좌측의 산으로 마루금을 이어 숨을 거칠게 몰아쉴 무렵 헬기장이 있는 용추봉에 4시에 도착하여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온 몸을 흠뻑 적신 땀을 닦는다.

 

남쪽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어둠 속에 거칠지 않는 너울을 오르 내리며 천천히 고도를 낮춰가며 희미하게 날이 밝아 오는 모습을 보이지만 다른 때 같으면 새벽 새소리로 아침을 맞이했을 때인데도 산새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월정리 저수지가 아름답게 내려다 보일 듯한 암릉지대의 조망 바위도 새벽 어둠의 아쉬움으로 지나고 고로를 낮춘 야산 길은 마루금까지 올라온 염소 목장 왼쪽에 고압선 전기 울타리를 따라 흘러가다가 철책 울타리의 열린 쪽문으로 들어가 농장 안쪽으로 5분여를 진행하다가 농장의 맨끝 부분에서 부서진 울타리 철책을 나와 울타리를 따라 바깥쪽으로 흘러 내려 5시 35분 2차선 도로인 792번 지방도로 오정자재에 도착한다.

 

중간 보급기지로 버스가 도착해 있는 오정자재는 새벽 공기에 실린 가축분뇨 냄새로 진동을 하고 있어 버스에 보관해 두었던 물과 도시락만 꺼내어 배낭에 넣고 깅을 가로질러 바로 강천산으로 향하는 마루금 산길을 접어 든다.

 

완만하게 고도를 높여가는 마루금의 왼쪽은 산약초 재배 농장으로 고압전기 울타리가 쳐져 있어 점근을 금지한다는 표지가 곳곳에 있는 가운데 울타리를 따라 올라 급격히 고도를 높여 간다. 봉우리를 오르던 길은 우측으로 트레바스를 타고 틀어 돌아 마루금을 이어간다. 조망이 좋으면 오른쪽에는 담양호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질 듯 한데 상수리나무와 소나무의 혼합림으로 이루어진 육산은 사방에 조망을 보여주지 않고 이따금 나타나는 정맥길 안내 리본에 의지하며 또 한차례의 오르막을 숨가쁘게 차고 오르니 길은 급격히 왼쪽으로 꺽여져 내리며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강천산 봉우리들을 6시 45분이 되어서야 눈 앞에 보여주기 시작한다.

 

잠시 산 밑에 작은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전경 조망을 한 후 내리막길을 내려 작은 너울을 출렁거리던 마루금은 6시 55분에 자일까지 걸린 암봉을 살짝 돌아 강천산을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만든다. 길가에 앉아 도시락을 꺼내 아침을 해결한 후 강천산을 향해 또 다시 발걸음은 고도를 올리기 시잓해서 7시 50분에는 공원입구에서 올라오는 삼거리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자 일반 산객들로 인해 차까지 다닐 정도로 산책로처럼 넓어진 편안한 능선길을 따라 7시 55분 왕자산 갈림길 이정표에 닿는다.

 

이정표에 배낭을 내려 놓고 강천산 주봉인 왕자봉으로 200미터를 건너가 증명을 남긴 후 돌아와 급경사 길을 따라 내려 안부의 형제봉삼거리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완전히 꺽어 송낙바위 쪽으로 마루금은 이어진다. 고도를 낮춰가며 가벼울 너울로 흘러가던 마루금은 제법 올라가는 봉우리를 앞에 놓고 왼쪽으로 트레바스를 틀며 돌아 부드러운 능선을 흘러 산성 북문터에  9시 20분에 도착한다.

 

삼국시대에 처음으로 쌓았다는 금성 산성은 삼국의 영토 다툼도 없었을 백제의 내륙지방 깊숙히 왜 이런 성이 있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사학계의 정설로는 인정되지 않는 마한의 후예로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호남을 지배하던 세력이 왜였고 백제가 부여로 내려옴에 따라 왜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천황이 되었다는 일부 사가들의 주장을 떠올려 보면 당시에 이 곳을 지배하고 있었을 세력이 만들었다는 추측밖에 달리 해 볼 방법은 없다. 광해군 때 소잃고 외양간을 고치기 위해 군부대의 주둔을 위해 다시 축조를 했음직한 성벽만이 동학란 때 건물은 모두 소실된 채로 정맥꾼을 맞는다.

 

이미 해는 머리 위로 올라 한낮 폭염으로 몰아가는 가운데 성벽에 올라 담양호 호수의 아름답게 펼쳐진 모습과 건너펴의 추월산 연봉의 병풍친 모습과 함께 아득히 멀리 희미한 모습으로 우뚝 솟은 앞으로 다가서야 할 광주 무등산을 바라본다.

 

산성벽을 따라 이어진 등로가 마들어진 마루금을 따라 9시 35분에는 강천사로 내리는 갈림길을 돌아 들어 연대봉을 지나며 왼쪽 계곡에서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시원한 계곡 바람에 잠시 발길을 멈추어 본다.

 

북바위를 지나 10시 동문이 있던 터를 지나 잠시 성벽을 떠나 오른쪽 편안한 등산로를 따르던 길은 200여미터 정도를 지나 왼쪽으로 급격히 올라가 성벽능선을 타고 흘러 내려 시루봉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서 10시 15분에 바로 왼쪽으로 꺽어져 급경사를 내리며 광덕산 줄기를 향해 마루금을 이어간다

 

정신없이 고도를 내리던 마루금은 한낮의 급격한 체력 소모를 바라는 듯 한차례의 숨가쁜 오르막을 앞에 놓았다가 정상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급경사를 꽤나 미끄러져 내린 다음 풀밭으로 무성한 헬기장을  10시 50분에 지나 200여미터의 고도를 두차례의 급경사 철제 계단까지 짚어가며 오른 끝에 정맥길 마루금에서 살짝 비켜난 광덕산에 11시 15분에 닿는다.

 

작렬하는 태양으로 인해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온 몸이 달아 오르는데 정맥길에서 40여미터 밖에 되지 않는 광덕산을 배낭을 벗어 놓고 맨 몸으로 올라가는데도 발걸음이 늦어진다. 산아래 마을의 곱게 들어 앉아 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한장의 증명을 남긴 후 되돌아 내려와 20여분 이상을 그늘에서 더워진 몸을 식히기 위해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방축마을을 향해 급경사를 흘러 내려간다.

 

매우 급히 떨어지는 급경사는 헬기장으로 향하는 임도를 지나 가로질러 계속 내리다가 문암재 고개를넘는 임도에 내려 길을 따라 잠시 흐르다가 산 속으로 마루금을 잇는다. 고도가 많이 떨어진만큼 또다시 서서히 올라가는 너울은 이어지고 한차례 너울로 봉우리를만들어 우측으로 틀어댄 정맥길은 한여름의 불볕더위와 장거리에 지친 몸을 300봉조차 올리는 발걸음을 지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지친 몸으로 300봉을 올라 왼쪽으로 틀어 급경사를 내려 이어지는 마루금 중간에서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길에 누워 휴식을 취한 후 산행 속도를 완전히 늦춘 걸음으로 1시 20분에 돌탑을 쌓아 놓은 덕진봉에 도착하여 한장의 증명을 남긴 후 급경사를 따라 내려 방축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마루금을 타고 내리던 길은 왼쪽 방향으로 틀어대더니 밭을 오르기 위한 농로를 거쳐 1시 35분에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 마을 골목길을 거쳐 길로 나오니 버스도 안보이고 마루금이 아니다.

 

도로의 모양을 짚어 마루금이 될듯한 오른쪽 고갯마루 파출소 쪽으로 100여미터를 걸어 올라 1시 45분 방축마을 표지석에서 마지막 증명을 남긴 후 오늘의 산행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