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 2009.7.5 (무박)
구간 : 구절재-고당산-개운치-송곳바위-추령
실거리 23 Km (누적거리 : 102.2 Km )
시간 : 9시간 15분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리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대탈 드디올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대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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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아 올라서 멀리멀리 비춰 주십시오.
지금쯤 어느 시장에 가 계시옵니까?
어두운 밤길을 가다가 혹시 진 데를 디뎌
수렁물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밤길을 가다가 몸이 고달프시면
아무데서나 짐짝을 부려 놓고 편안히 쉬십시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혹시나 내 남편이 가는 길이 어두울까 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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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 고려가요로 눈에 익은 정읍사의 한대목이다. 고려사악지에 실린 이유로 고려가요로 알고 있지만 당시의 고려사악지가 전승되고 있는 가요를 모아 실어 놓은 것으로 볼 때 국문학자들 사이에서는 유일하게 전승되고 있는 백제가요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 모양이다.
동동 정과정 처용가 등과 함께 조선조 악학궤범에도 실린 정읍사는 삼국속악의 하나로 전승되어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무의 때 가창되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을 쫓기 위하여 베풀던 에서 처용가 등과 함께 연주되었다고 하나 중종 이 후에 음란하다고 하여 궁중에서는 폐지되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국문학자가 아니니 백제가요이든 고려가요이든 내 님이 가신 시장이 전주의 시장이든 아니면 정읍의 어디 장터이든 그런 것은 접어 두고 우리 언어의 옛 모습을 이해한다며 배웠던 정읍사는 장에 나가 오랜동안 돌아오지 않는 장돌뱅이 남편을 기다리는 애틋한 부인의 모습을 그려내는 아름다운 가요로 청소년기에 가슴 속에 들어와 자리잡았다.
당시 유교 통치 이념이 도입되기 이전에 정조 개념이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이런 가요가 만들어졌다고 좋게 해석하는 측면도 있으나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이건 기반을 이루고 있는 하층 민중이건 남녀를 막론하고 고려시대의 성의 자유 분방함은 역사 속에서 이미 더 이상 부연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이고 보면 그 이전의 상황은 더 이를 바가 없을 것이리라. 더우기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이 동맹하여 고구려를 한수 이북으로 밀어 올린 뒤 진흥왕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아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로서는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하여 신라와 대규모 전투를 치르고 관산성에서 성왕까지 잃은 뒤에는 신라와 내내 적대 관계였으므로 하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남자들은 전쟁터에 끌려 나가고 죽고 하는 일이 다반사였을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질병과 기근과 산적처럼 일정한 거처도 없는 부랑자 강도와 사람 목숨까지 노리는 맹수들과 거기에 전쟁까지 사람을 시달리게 만들어 밤새 안녕은 물론이고 아침과 저녁이 어찌 같을 것이겠는가. 이런 시절에 남정네 없이는 살아갈 방법조차 없는 아낙들에 있어서 집을 떠나 오랜동안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는 애타는 마음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고 남자의 숫자는 이론적으로도 현저히 적었을테니 형이 죽으면 형수를 시동생이 데리고 살아야 하는 형사취수제 같이 당시에 존재했던 제도적 장치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일부 일처제의 개념보다는 능력이 있는 남자가 최대한 남은 여인들을 보살펴야 사회적 안전망이 동아갈 수 있는 시절이었을 것이 불을 보듯 당연한 일이니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지금의 상황에 비추어 당시를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오늘은 애절한 백제가요 정읍사의 기반이 된 옛 정읍현의 구불구불 구절재에서 정맥길 밟기를 시작한다.
장마철이라 언제 소나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갈지 모르겠고 더위는 얼마나 기승을 부려댈 지..
모든 것이 걱정인 가운데 23Km로 비교적 짧다는 구간이라는 안도감 하나로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다.
새벽 2시 30분 꾸벅꾸벅 비몽사몽간에 구절재에 도착을 했지만 새벽잠을 털어내는 데도 10여분 이상 뒤척거린다. 정신을 차려 버스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 보지만 하늘에는 별도 달도 보이지 않으니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고 지난 번에 내린 날머리 조차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산행 준비를 대충 꾸린 후 버스 뒤쪽으로 돌아가서야 새벽 운무 속에 희미한 장승이 서 있는 것으로 날머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반대편의 들머리로 방향타를 잡아 2시 50분 고개 표지석 뒤 고추밭 사이를 가로질러 정맥길 마루금을 밟기 시작한다.
커다란 고도차 없이 부드러운 길에 잡목 숲을 헤쳐가며 소나기가 한차례 지났는지 제법 물기가 많은 나뭇잎의 새벽 이슬을 털어대던 바지가 젖어든다고 생각될 무렵 고압 송전탑을 지나 능선에 올라 가벼운 출렁거림으로 마루금을 이어간다. 새벽에 운무까지 끼어 있어 전후좌우 볼 것 없이 걸음만 옮겨 가니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오늘은 체력상의 문제점은 없겠구나 생각하며 두번째 철탑을 지나 능선을 약간 오르던 길은 선두가 반곡리 마을로 내려가는 길로 잠시 알바를 거친 후 뒤로 돌아 좌측으로 급경사를 타고 올라 몸이 후끈 달아 오르고 등판에 땀이 흥건하게 젖어올 때 428봉 삼각점을 4시에 지난다.
바로 이어지는 급경사를 타고 내려가는데 시간은 이미 여명이 밝아올 때가 되었어도 습도 가득한 장마철에 운무까지 가득하니 산새조차도 늦잠을 자는 듯 조용한데 소쩍새 울음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오는 가운데 숲길을 헤쳐 내려 연화정사의 건물 한채만이 한가로운 모습으로 어둠을 지키고 있는 사적골재 시멘트도로 삼거리에 4시 23분에 내린다.
내 님믈 그리자와 우니다니 山 졉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달 아으
殘月曉星이 아라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데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過도 허믈도 千萬 업소이다
말힛마러신뎌 살읏븐뎌 아으
니미 나랄 하마 니자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
내 님(의종)을 그리워하여 울며 지내더니 산 접동새(소쩍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나의 죄가) 아니시며 거짓인 줄은
저 달과 빛나는 별도 아실 것입니다
넋이라도 임을 함께 지내고 싶어라
우기시던 이 뉘십니까
잘못도 허물도 천만 없습니다
뭇사람들의 참언이시도다 슬프구나
임이 나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소, 임이시여
되돌려 들으시어 사랑하소서
...............................................................................
정과정곡은 우연치 않게 악학궤범에 한글로 실린 탓에 신라 향가의 잔영이 남아 있으며 우리말의 변화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이 시는 임금을 그리워하며 지은 충신연주지사라고 교과서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한적한 곳에서 밤에 접동새 소리를 들을 때면 저절로 마음이 가라 앉아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듯 하다.
고려 중엽 치열한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동래로 귀양을 가서 임금을 그렸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의 기록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으니 무신란 이후에 풀려난 것으로 볼 때 당시에 약자이던 세력을 비호 두둔하다가 반대 세력에게 추출되지 않았나 혼자 생각해 볼 뿐이다.
잠시 멈추어 서서 후미가 도착할 때를 함께 기다렸다가 땀에 젖었던 몸이 추워지기 시작할 무렵 석탄사로 향하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 20여미터를 걷다가 우측에 잔디밭처럼 갈끔히 벌목해 놓은 산으로 접어 들어 산을 돌아 올라오는 시멘트 도로를 만나고 잠시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오르던 마루금은 모퉁이를 돌면서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가파르게 달라 붙어 산으로 들어간다.
급경사로 바짝 올려 붙이던 정맥길은 고도계를 460까지 올려 놓으니 우측 밑에 석탄사 불빛을 나뭇잎 사이로 비추며 능선길을 밟아간다. 산 위의 능선길은 새벽 이슬의 흔적조차 없이 말라 있고 아침 운무만 산 밑으로 자욱한 모습으로 깔려 있고 하늘은 파란 모습으로 아침이 밝아 오는 476봉에서 왼발은 임실을 이별하고 순창을 받아 들인다. 정맥길 내내 30여미터 간격으로 간간이 붙어 있던 임실국유림의 노란 리본은 오늘도 산행길 동무가 되어 따라 왔는데 임실지역을 지나자 리본이 눈에 띄지 않는다.
몇십미터 정도의 고도차를 보이는 작은 출렁거림으로 차츰 차츰 고도를 높여간 끝에 553고지를 지나는 5시 30분에는 등 뒤의 나뭇잎 사이로 아침해가 어느새 중천으로 올라와 나뭇잎 사이로 햇살을 비추기 시작한다. 내리막길로 이어진 길을 따라 고도를 낮추며 다시 아침이슬이 잡목 숲은 적셔 놓은 운무 속으로 들어가 오전 6시에 복분자 밭이 펼쳐진 굴재에 도착한다.
때마침 익어 있는 몇개의 복분자 맛을 보며 지나는 밭둑길은 오른쪽으로 꺽어져 밭을 나가 굴재를 넘는 시멘트 포장 농로 곁의 복분자 밭 농사를 위해 만들어 놓은 천막 원두막 시설 뒤로 마루금을 이어간다. 숲속을 잠시 지나던 길은 온통 산딸기 밭으로 오르막길이 되어 있으니 걸음을 멈추고 산딸기 먹기에 정신이 없어 올라가는 산길이 많이 지체된다. 낮게 깔린 운무를 벗어나 왼쪽으로는 벌목된 잡목만 우거진 길에 아침 햇살이 등 뒤를 따갑게 내리쬐어 더위가 시작되고 고도를 바짝 올리는 힘든 길임에도 불구하고 힘들다는 생각없이 산딸기의 힘으로 산 정상 가까이 우거진 산죽길을 헤쳐 올라 6시 51분 고당산 정상에 닿는다.
한장의 증명을 남긴 후 아직 아침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모두들 정상에서 아침을 먹는 분위기라 도시락을 먹지만 반쯤 먹다가 접고 식사를 하는 후미 산님들을 남기고 부드럽게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길을 내려 대나무 숲길을 지나 7시 51분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가 기다리는 개운치에 내린다.
홀로 고개를 지키는 독립 민가 안마당에서 세수를 하고 땀을 씻어낸 후 비가림 준비를 위해 준비했던 옷가지와 빈 도시락을 대기중이던 버스에 남겨 두고 21번 국도 개운치 고개를 가로질러 산으로 들어간다. 우측으로 부드럽게 틀어돌던 산길은 능선을 타고 올라 고도를 점차 높여 가며 능선을 타고 오른 끝에 통신중계소가 정상을 차지하여 정맥길이 철조망 울타리 좌측을 따라 험한 모습으로 이어진 망대봉을 8시 26분에 지난다.
통신 중계소로 이어진 시멘트 포장로를 따라 급히 우측으로 돌아 내리며 멀리 반시계 방향으로 길을 따라 돌아 내리던 정맥길은 도로가 바짝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내려가기 시작하는 두들재에서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왼쪽 산길로 접어 들어 부드럽게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여 두어번의 출렁거림 끝에 여시목을 지나 입산금지 표지가 있는 내장산 국립공원 경계에 9시 11분에 도착한다.
조선시대 붕당 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숙종 때는 관리들의 파벌 조성이 극에 달하고 외척들의 권세가 조정을 흔들던 시기라 명성왕후 인현왕후 장희빈 등 대궐 내 내명부의 권력 다툼과 함께 사극 드라마의 단골 메뉴가 되어 있다.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권력으로 향하는 유일한 방법인 관리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양반의 수는 급격히 늘고 있으니 과거의 급제는 물론이고 급제 후의 출세도 어느 집단의 소속이 되어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으니 중앙 파견 관리인 지방 수령에게만 지방민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어 주는 국가 관리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2천년 전에 환경에 맞추어 만들어진 국가 관리의 틀을 유지하려던 사대부층의 기득권 문제로 해결이 어려웠다는 생각이 든다.
지방 수령을 제외하면 각 고을 수령 밑에서 일하는 아전들은 중인 계급으로 사회적인 대접은 물론이고 급여조차 받지 못하는 시스템이니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수령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연결된 고리에 바쳐진 뇌물을 복구해야하고 지방 아전은 생활을 위해 수탈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니 사회는 급격히 부패로 향해 갈 수 밖에 없을 일이다.
인조 때 여진의 누루하치가 새로 세운 청나라가 지금까지 조선이 섬겨 온 명나라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니 모화사상으로 명을 섬겨 오던 원칙을 고수하는 성리학자들이 주축인 조선은 그 기반부터 흔들릴 수 밖에 없을 노릇이다. 급기야는 병자년의 호란으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며 항전한 끝에 청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
많은 선비와 장군들이 삼전도의 굴욕적인 강화에 울분했지만 젊은 관리 시절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했던 우암 송시열도 삼전도의 치욕을 눈 앞에 보며 이 후 효종 때 북벌론을 주장하는 중심에서 반청에 앞장서는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 사단칠정의 근우너을 두고 조선의 성리학을 발전시킨 주리론의 이황과 주기론의 이이 사이에서 이이의 주기론을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서인 계열 중 노론의 거두가 되어 정국을 이끌면서 당파 싸움에서 부침을 거듭하던 우암 송시열은 숙종의 세자 책봉이 이르다고 주장하다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국문을 위해 압송되던 중 이 곳 정읍 땅에서 73세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다.
노론의 태두였던 우암은 조선 후기가 노론의 전제 정권이 되어 과장되게 추앙된 면도 없지 않지만 기호학파로서 성리학 이론의 정립과 함께 조선 후기 사상을 이끌었던 우암의 위치를 평가 절하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의 4단과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칠정의 사람이 갖는 감정이 이성으로부터 나오던 기질로부터 나오던 그리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이황..성혼..이이..송시열.. 조선을 이끌어 간 성리학의 대표 철학자들의 하릴없는 논쟁보다도 조병갑 고부군수 같은 탐관오리의 착취로 인해 이 동진강 줄기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다가 울분 속에 죽어간 이름없는 동학 농민 혁명의 원혼들이 호남 정맥길을 더 슬프게 만든다.
한차례의 휴식 후 바짝 고도를 올린 후 봉우리를 지나 왼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어 내리던 마루금은 4미터는 족히 되는 커다란 산죽밭을 지나 숨이 턱에 닿도록 만든 뒤에 고도 470 정도의 무명 봉우리에 올려 놓는다.
멀리 도로 건설에 한창인 모습이 왼쪽 밑으로 보이고 공사중인 복룡재 터널이 보인다. 마루금은 복룡재 터널 왼쪽을 따라 다시 산으로 오르도록 되어 있는 모습이다. 부드러운 능선길의 두어번의출렁거림으로 길을 가는데 왼쪽 마을에 오전 10시를 가리키는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 온다. 공사중이 포크레인의 돌을 깨는 망치 소리를 들으며 공사중으로 위험 표지가 쳐진 마루금 길을 따라 간다. 그다지 교통 문제가 심각하지도 않은 한적한 시골 마을인데 저렇게까지 온 산천을 구멍을 뚫어가면서 새로 도로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10시 18분 복룡재를 지나 온 몸이 땀에 젖어 흐르도록 힘을 쓴 후에 송곳바위를 앞둔 무명봉에 올라 송곳 바위를 바라보며 잠시 땀을 식힌다.
능선을 따라 50여 미터를 내리던 마루금은 송곳바위로 이어 붙어 위험 표지가 있는 뒷편으로 곧바로 암릉 직벽을 타고 오른 끝에 11시 14분 송곳바위에 오른다. 말발굽 모양의 병풍처럼 둘러쳐진 내장산의 모습이 정면으로 환하게 들어오고 왼쪽 능선 너머로는 서마리 저수지 모습이 햇볕에 반사되어 곱게 들어 온다.
마루금은 구불 거리며 올라가는 추령을 따라 오른쪽으로 바짝 꺽어 내려 추령 고갯마루로 흘러가는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이제는 다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늘에 앉아 쉬었다가 느긋한 걸음 걸이로 부드러운 출렁거림을 타고 12시 5분 추령에 내려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 한다.
몇개의 모텔과 함께 개점 휴업인 음식점 몇개에 넓은 주차장은 비어 있고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산림 박물관으로 들어가 몸을 씻을까 하여 확인을 해보니 버스가 선두를 고개 아래 식당에 내려 주러 갔으니 곧 올라온단다. 도착한 버스에 짐을 내려 놓고 지나던 트럭을 타고 700여 미터 떨어진 식당으로 내려와 몸을 씻은 후 토속 청국장 식사로 산행의 피로를 덜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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