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 2009.6.7 (무박)
구간 : 염암재-오봉산-운암3거리-묵방산-가는정3거리-성옥산-소리개재-왕자산-구절재
실거리 30 Km (누적거리 : 79.2 Km )
시간 : 12시간 35분
아버지 지난번에 가져가신 제 세배돈 돌려주세요.
알았다. 내 윤동짓달 초하룻날 돌려 주마.
그게 언제인데요?
네가 달력을 찾아 봐라.
천팔백몇십년부터 이천몇십년까지 음력날짜 ,24절기,육십갑자가 적혀있는 만세력을 장농 깊숙이에서 꺼내서 온종일 살펴 보았지만 삼년 정도마다 돌아오는 윤년에 윤동짓달은 없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까까머리 고교시절이었다.
돈을 안 돌려준다는 표현을 해학으로 완곡히 표현하신 것이다.
율리우스력이니 그레고리력이니 로마시대부터 태양력을 쓰던 서양은 정확한 태양의 위치를 잡았기 때문에 농사일에는 그다지 걱정이 없었을 것이지만 달의 주기 운동에 따라 태음력을 사용했던 동양에서는 태양과 달의 주기가 틀림으로 인해 여간 골치 아픈일이 아니었을성 싶다.
29.5일의 주기를 갖는 달은 관측이 쉬어 달력 만들기도 쉽고 물때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유용했겠지만 나무기둥을 꽂아 놓고 그림자 길이로 시간과 날짜를 측정해야 하는 태양은 관측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들었어도 농사라는 것이 태양의 위치에 의존하는 일이니 달력과 별도로 태양 움직임 중심의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싶다. 이런 환경이 24절기라는 동양만의 독특한 태양 주기표를 만들어야 했고 그 완성은 이미 공자가 세상에 다녀간지 100여년 이상이 지난 기원전 400년경 전국시대인 동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가 가장 긴 날을 하지라 하고 짧은 날을 동지로 잡아 하지에서 다음 하지까지를 24개로 나누어 각각의 이름을 붙여 의미를 부여하고 농사의 지표로 삼아 만들었지만 태음력과 태양 주기는 1년이면 12달에 열흘 정도는 더 차이가 나니 이것을 맞추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고육지책으로 3년에 한번씩 윤달을 넣어 보지만 그도 세월이 흐르면 어긋나기 시작하고 이 정확성을 찾기 위해 동양에서는 많은 세월 노력을 기울여 법칙을 만들어 내어 운영하고 있지만, 개화 때인 대한제국시절부터 사용한 태양력과 함께 서양의 공부에 익숙해진 우리는 4년에 한번 2월이 29일까지 있다는 사실에는 익숙하면서도 음력 윤달은 19년에 7번 들어간다는 것은 대개 알지도 못할 뿐더러 관심도 없이 살고 있다. 언제 윤년이 되고 윤달이 몇월이 되는가에 대한 규칙은 한국천문지리원이 만든다고 되어 있으나 기실 이것은 300여년전 청나라 때 수정해 놓은 규칙에 따라 하는 것이므로 음력을 사용하는 동양 문화권은 모두 동일하다.
법칙을 간단히 보면 윤달을 넣는 해가 되면 동지는 반드시 동짓달에 들어 있어야 하고 하지는 반드시 5월에 들어 있어야 하며 입춘은 정월 초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법칙에 바탕을 두고 계산을 하면서 몇월을 윤달로 할 것인가는 또다른 세부적인 룰로 살펴서 결정했으니 동짓달과 섣달은 윤달이 이론적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고, 수학공식에 의해서도 윤년과 윤달은 일정한 법칙이 나올 수 없도록 되어 있으니 일반인이 알려면 책으로 만들어 배포를 할 수 밖에 없어 천세력 혹은 만세력이라 일컫는 이 책은 예전에는 농사를 짓는 가정에는 필수품이다시피 했으나 24절기를 환하게 알 수 있는 지금은 역학인에게나 필요한 책으로 전락해 있는 실정이다
하지는 6월 21일이나 22일인데 뭐가 어려워 그러는가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양력 달력에 익숙헤 있는 요즘의 얘기일 뿐,어린 시절만 해도 양력설을 왜 놈의 설이라며 무시하고 음력이 더 중요시되던 시절에 어른들의 말씀을 가상으로 해 본다면 아마도 이와 같을 것이다.
올해는 하지가 오월 그믐께라네.
오월에 윤달까지 들었으니 이번에 묘소 이장도 하고 뒷간도 고쳐야겠어.
윤달 되기 전에 감자는 다 캐야 될텐데..
그나저나 아직 심지 않은 곡식 있으면 이달까지는 심어야 소출을 볼 수 있을텐데..
개망초 꽃이 온 산하에 흐드러지게 피는 하지는 논일과 밭일에 정신없이 바빠 칠월 보름 백중 때가지는 부지깽이까지 한몫 거든다는 속담이 내려올 정도로 농촌은 바쁜 시기이다.
때마침 산행일이 하지인지라 옛생각을 잠시 하면서 산행길에 오른다.
낮에 줄기차게 내리던 비는 다소 가늘어지면서 이슬비로 변하고 내일 오전이면 남쪽 지방도 개일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접하지만 비가 많이 오면 미끄럼 때문에 부상 위험과 산행 속도도 문제지만 빗물의 침투로 인해 발바닥을 비롯한 사타구니 등 신체 마찰 부위의 상처가 발생하면 체력이 남았음에도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을 장거리 산행을 하면서 많이 경험을 해 본 터라 불안한 마음은 여전한 채로 사당역에 도착한다
한낮에는 해가 나지 말아야 체력 소모가 적을텐데 생각을 하면서도 안내된 산행이 12시간이 후미 기준이니 빠른걸음이면 10시간이면 되겠다 싶어 이 부분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식수 3리터로 커버할 생각을 한다.
탄천휴게소에서 잠시 쉬어 장거리 산행에 대비해 라면 한그릇을 먹고 잠시 다시 눈을 붙이는 사이 이미 차량은 2시 50분 염암고개 위에 우리를 내려 놓는다. 밖에 비가 온다는 말에 비가림 차림으로 내렸지만 이슬비도 아닌 걷혀 가는 안개비 수준이니 상체는 비를 맞고 산행하고 하체는 밤새내린 비 때문에 산행에 문제가 생길 듯 싶어 스패치에 오버트라우져를 입고 2시 55분쯤 이미 선두의 산행이 시작되어 랜턴 불빛이 용처럼 길게 휘어지며 승천할 듯 하늘로 올라가는 꼬리 부분에 달라 붙는다.
초반부터 랜턴으로 땅에 떨어진 물건이라도 찾아야 할 듯 정맥길은 바짝 코 앞으로 들이댄다. 급경사에 비로 인한 미끄럼으로 인해 오르막 진행 속도가 늦은 것이 오늘 산행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온다. 후끈하게 몸을 달구는 더운 기운이 한차례 지나고 운무와 안개비 그리고 어둠에 의한 시계 불량으로 약간의 알바 혼선까지 빚어가며 땀이 온몸에 배여 흠뻑 적시고 나서야 520봉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린다. 정맥길은 완전 급경사 내리막을 앞에 놓고 미끄러지듯 한없이 내려가서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잡목 숲을 헤친다. 어둠 속에 주변 윤곽을 보니 무슨 고개인 듯 하니 이곳이 소금바위재인 모양이다. 수풀을 빠져 나와 묘소 앞에서 물을 털어 옷 매무새를 다듬고 다시 수풀 속을 헤쳐 들어가 급경사길을 타고 올라 4시 3분에 2봉에 도착한다.
이제 심한 출렁거림은 끝났는지 이어지는 부드러운 능선길을 밟아가는데 아직 주변은 여명도 밝아오지 않았음에도 멀리서 검은등 뻐꾸기 소리가 제일 먼저 아침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이따금 노란 리본에 숫자가 써져 달려 있는 것이 임실 국유림 관리소에서 붙여 놓은 듯 하다. 거리가 규칙적이어서 발걸음으로 재 보니 약 30미터 간격은 되는 듯 하다. 그럼 이 리본을 어디까지 달았을까 임실군 경계선을 따라 정맥길에 계속 달았다면 오늘의 산행 거리상 저 번호는 900번은 넘어야 산행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걷는다.
4시 34분에 4봉을 올라 길 방향을 잡기 위해 주변을 둘러 보는데 앞 20미터 정도의 거리 앞의 어둠 속에서 멧돼지가 숲을 헤치고 뛰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 밤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도망가는 듯한 생각이 들어 슬며시 예고없이 찾아든 불청객의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길은 우측으로 예각으로 완전히 꺽어 능선으로 흐르다가 4시 41분 5봉 이정표를 지나 4시 49분에 오봉산 표지석을 내어 놓는다.
희미하게 날은 조금씩 밝아오지만 운무에 가득 싸여 옥정호 모습이 보일 리가 없다.
한장의 증명을 남기고 전망바위에서 아쉬움으로 이별을 하고 표지석 뒷쪽 잡목숲을 헤쳐 내리다가 왼쪽길로 접어 돌아 능선을 붙어 내려가지만 일반인들의 산행 코스가 아닌 모양이다. 곧 잡목이 우거지고 어두운 새벽 길 찾기가 쉽지 않다. 노란 리본이 어디 있나에 중점을 두고 희미한 흔적의 길을 찾아 내려가니 앞에 출발님을 비롯한 선두 산님들 10여분이 거의 개척 산행을 하듯 진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함께 수풀을 헤치며 5시 12분 벧엘기도원 들어가는 시멘트 도로로 걸어 내려와 5시 14분 743번 도로를 가로 질러 철조망 오른쪽으로 돌아 마을 뒷산 같은 정맥길로 들어간다.
마루금 곁에 한적하게 두분상이 따로 누워 계시는 경주김씨와 부인 문화유씨 부부의 묘소를 지나서 5시 24분에는 다시 743번 도로를 가로질러 들어가 6시 24분에 산마루에 올라서 있는 수원백씨 선산 위에서 교각만 설치한 옥정대교의 모습과 물이 모두 빠져 버린 옥정호 모습을 바라 본다.
갈길이 멀어 정5품 통정랑을 지냈다는 수원백씨의 비문은 제대로 살피지도 못하고 지나 곁을 돌아 6시 39분 도로 위에 내리니 도로 한켠에서 선두 산님들이 식사중이다. 도로 위에서 초당골 앞뜰을 바라 보니 새로 건설될 도로가 지나갈 곳이 공사로 인해 파헤쳐져 있다. 먼 산행길에 아침 식사 시간을 조절할 필요를 느껴 선식으로 가볍게 목을 축인 후 743번 도로를 따라 고갯길을 지나 운암3거리에서 어부집 식당 왼쪽으로 비탈을 타고 올라 마루금을 살핀 후 밭 건너편 숲길을 따라 6시 47분 다시 정맥길을 이어 간다.
거미줄과 함께 나뭇잎마다 흥건하게 괴여 있는 빗물을 털어가며 가는 산행은 선두가 아니면 겪어 보지 못할 일들이다. 선두 산님들이 식사를 하는 사이에 몇걸음 일찍 출발한 탓에 선두가 되어 때 아닌 거미줄 걷는 호사(?)를 누린다. 한차례의 급경사로 호흡이 거칠어지도록 땀을 쏟아낸 후에 7시 13분 묵방산 모악지맥 분기점에 닿는다.
군경계선은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지맥을 따라 이어지게 되므로 지금부터 오른쪽 발은 완주군을 떠나 보내고 정읍시가 들어오고 모악지맥을 물가름으로 하여 만경강 줄기는 떠나 보내고 동진강 줄기를 맞으니 이 곳이 섬진강까지 삼수분기점이지만 낮은 한자락 야산에 갈잎나무들만 무성한 중에 이정표 하나만 서 있을 뿐 조망이 없어서 이렇다할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내리막길로 접어 들던 마루금 길은 묵방산의 가파른 비탈에 바짝 샅바를 잡아 고갯길을 힘들게 넘어가는 증기기관차처럼 숨이 턱까지 오르도록 만든 끝에 7시 54분 덜렁 판때기 하나 붙은 묵방산 정상을 내 놓는다. 간식과 함께 잠시 쉬면서 뒤따라 온 선두 산님들을 먼저 보내드린 후 능선 사이로 언뜻 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옥정호를 바라보면 흘러간다.
옥정호라는 이름 속에서 동정호라는 이름을 문득 떠올려 본다.
호남 악양 칠백리 동정호는 소싯적 두시언해에 몇자 섞어 주는 것으로 맛보기에 그쳐야 했던 두보의 행적에서 그 이름을 들었다. 떠난지 천년이 훨씬 넘었어도 그 이름이 퇴색되지 않는 두보는 혹자는 시선(詩仙)이라고도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천재와 같은 재능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도 낙방하고 평생 가난으로 찌들어 살면서 그럴듯한 벼슬도 못해보고 식구들까지 고생시키다 객지에서 병사한 불우했던 시인이다. 안록산의 난을 피해 동정호까지 내려와 떠돌던 두보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많은 시로 남겼고 옛 시인묵객들이 애송하는 추구집에도 실려 있고 교과서에도 실린 절구 한편은 고향을 그리는 애절한 마음을 잘 나타내는데 있어서는 과문한 탓에 이에 비견할만큼 함축된 표현을 아직 접하지 못했다.
江碧鳥逾白(강벽조유백) 강물이 파라니 새가 더욱 희구나
山靑花欲燃(산청화욕연) 산이 푸르니 꽃이 불 붙는 듯 하네
今春看又過(금춘간우과) 이 봄도 또 지나가니
何日是歸年(하일시귀년) 언제가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해인가
능력이 출중함에도 세상을 잘못 만나 뜻을 제대로 펴 보지 못하고 스러져 간 이가 역사 속에 어디 한둘이던가. 동명황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나라가 어수선한 때에 세상에 나온 불우함으로 치부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꼬여 버렸지만 그로 인해 겪은 생활의 곤궁함에서 나온 주옥 같은 시는 당대의 호화로운 시로 비견되는 이태백과는 완전히 다른 맛을 보여 주니 오히려 후세에 이름을 전하기로는 결과적으로 잘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고향에 대한 수구초심의 마음을 함축시킨 네줄의 절구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를 바라보며 두보처럼 멋진 시 한편은 남기지 못할지라도 물이 가득한 옥정호를 바라보며 정맥길 산천의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잡지 못하니 아쉬움을 담은 긴 한숨으로 옥정호의 감상을 대신할 뿐이다.
백제를 멸망할 때 나당 연합군 장군으로 왔던 당나라 소정방이 토지의 주무대가 된 하동 평사리 부근을 동정호와 비슷하다 말해서 그 지역 이름이 동정호가 되어 관광지로 개발을 하겠다고 요즘에 들썩거린다지만 사실 그 곳은 토지를 배경으로 한 문학적 관광지로서의 자리매김이 훨씬 나을 듯 하고 오히려 물을 가득 채워 놓으면 이 곳 옥정호가 동정호와 같은 호수로서의 자리매김이 훨씬 나을 듯 하다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 본다.
정맥길은 8시 28분 높은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헤치고 내린다. 윗지방에서는 빨랫줄을 걸치던 바지랑대로 쓰이고 그 높은 끝에 고추잠자리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만 기억되던 대나무는 남쪽지방에서만 자란다고 달달 외웠을 뿐 남도 지방 출신이 아니면 이런 대나무 숲도 신기함으로 와 닿는다. 백두대간길 지기재 넘어 신의터재 가는 길에 대나무 숲을 본 이후로 호남 정맥길에서는 처음으로 접한다.
대나무 숲길을 내려 폐가와 같은 민가의 뒷곁을 지나 앞으로 돌아 나오니 마당 한켠의 매실나무가 노란색으로 익어간다. 한개를 따서 입에 넣어보니 씁쓸하기만 할 뿐 별다른 맛이 없다. 요 몇년 사이에 청매실은 전국적으로 붐이 일고 있는 모습이다. 겨울 김장이 배추라면 여름 김장은 청매실 앉히기가 된 모습이다. 청매실과 노란 설탕을 1:1 무게 비율로 항아리에 재워 놓고 100일이 지난 뒤에 매실 원액을 취하여 자연 음료수로 만들어 먹거나 각종 요리에 감미료로 넣어 먹는 일은 김장 담그는 일처럼 어지간한 집은 30Kg 정도는 재워 놓는 일이 된 듯 하다.
새터 마을 앞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오른쪽 마루금에 앉아 있는 창고 건물의 우측 뒤를 돌아 허름한 민가의 뒷꼍으로 이어진 마루금을 살짝 넘어 밭과 풀숲을 지나면 아랫쪽 마을에서 마루금 능선으로 이어 광산김씨 선산까지 잇는 시멘트 도로를 만난다.
앞선간 산님들이 도로 아래 민가의 수돗가에서 물을 채우고 땀을 씻는 샤워를 모습이 보인다. 햇볕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날씨에 그늘에 앉아 편안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스패치도 벗어 넣고 해가림 차림으로 바꾼 후 8시 56분 시멘트 도로 끝머리에 있는 광산김씨 묘역 우측을 타고 정맥길을 따라 산으로 접어 든다. 비교적 부드러운 야산을 거쳐 옥정호를 내려다 보는 묘소 곁을 따라 내려 9시 16분에 가는정 삼거리에 닿는다. 옥정호 산장 간판이 서 있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올라 가며 오른쪽 길가에 있는 커다란 뽕나무에서 오디 몇개를 입에 물고 올라 마루금 상에 버티고 있는 가는정이 식당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좌측으로 시멘트길을 따라 틀어 돌아 우측 윗쪽에 있는 식당 주차장을 가로질러 산속으로 정맥길을 이어간다.
한여름처럼 달궈대기 시작하는 볕에 온몸이 땀으로 된 목욕을 한 후에 능선위에 올라서니 오른쪽 정읍시 방향으로는 이발을 하듯 넓직하게 계곡 아래까지 벌목을 한 모습이다. 여기에서 임실군의 경계선은 왼쪽 능선을 타고 내려 옥정호를 건너가니 이제는 마루금 전체가 정읍시로 들어간다. 벌목지역 가르마를 타고 내리다 숲으로 다시 들어가 올라서 10시 43분에 성옥산 표지판을 잡는다.
표지판을 지나 20여미터를 지나자 바로 우측에 또 벌목지대가 계곡까지 펼쳐 있는데 벌목한 나무로 산행로를 틀어 막아 놓아 이리저리 피해서 능선을 따라가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해를 끼치지 않는 산행객을 막으려 벌목을 하면서 굳이 마루금 산길을 일부러 틀어 막은 사람의 속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지난다.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 여기저기 덤불이 긁히고 가시에 찔리며 산속을 헤매고 내려 밀양박씨 묘소를 지나 옥정호를 내려다 보며 10시 58분 고구마 밭 가운데로 발을 딛으며 내려가기 시작한다. 밭 둑을 타고 내려 우측으로 농로를 타고 걸어 들어 소리개재에 내려 선다. 옥정호 방향으로 모퉁이를 돌아가면서 11시 2분 정읍시 산내면 표지판을 지나 정맥길은 우측으로 바짝 꺽어서 다시 밭위로 올라 밭 둑을 몇개 타고 걷다가 이 내 소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참나무류의 갈나무 숲에 싸리와 찔레 등 잡목으로 온통 긁히다가 솔잎으로 깔아 놓은 주단길에 소나무 그늘로 진행을 하니 더위에 지쳐가는 몸을 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잠시 옥정호에서 바람이 불어 오는 한 구석 소나무 그늘에 앉아 달콤한 휴식 시간을 갖는다.
등산화에 물이 들어간 탓에 엄지발가락 물집이 잡혀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지만 더위로 인해 빠른 체력 소모가 오늘 산행의 성패를 좌우할 듯 하여 산행 속도를 한템포 늦춰 최대한 체력 저하를 막는 세이브 모드로 진행하기로 생각하고 11시 15분에 천천히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 한다.
부안김씨라고도 하는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마의태자가 시조인 부령김씨 묘소를 11시 28분에 지나 부드러운 능선 길은 잠시 후에 묘소 윗쪽으로 직진하는 숲길을 보이지만 알바를 막기위해 나뭇가지로 둘러쳐 막아 놓았다. 머리를 돌려 보니 정맥길 리본은 묘소 앞 왼쪽으로 나 있는 임도를 따라 마을로 내려갈 것을 가리키며 펄럭거리고 있다.
11: 40분 임도는 두월리 방성골 마을 앞 중심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곁을 지나 올라온 시멘트 포장 농로를 만난다. 좌우로 마루금 형태를 둘러보니 비닐 하우스 곁을 따라 직진으로 밭을 가로질러 산으로 접어 들어야 맞는 길이다. 비닐하우스 곁을 따라 밭 사이를 걸어 올라 산으로 들어가는데 밭에서 올라오는 지열에 숨이 막혀 온다. 저 멀리 왼쪽 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아주머니들이 보인다. 이 날씨에 밭 일도 하고 계신데 정맥을 답사하는 호사를 누리면서 산행의 고통을 생각하고 있는 내 마음을 스스로 꾸짖으며 산 속으로 수풀을 헤치며 오른다.
산으로 이어지는 수풀은 산나리꽃 엉겅퀴꽃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 군락으로 눈의 즐거움을 한껏 안겨주며 피로에 지쳐가는 육체를 위로해 준다. 산으로 접어 들어 된비알을 앞두고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버린 몸을 식힌 후에 햇볕을 등에 받으며 된비알을 향해 딛어 올리는 발걸음이 점점 늦어진다는 생각이 들어갈때쯤 왕자산 전위봉 능선에 올라서서 오른쪽으로 능선을 타고 잠시 돌던 정맥길은 또 한차례 땀을 요구하는 된비알을 앞에 세운다. 강렬한 더위로 인해 급격히 소진되어 가는 체력 때문인지 완전히 좁은 보폭에 서행모드가 되어 12시 50분에 나무에 걸린 왕자산 표지판을 잡는다.
지도는 물에 젖어 이미 버린지 오래이고 육감으로 정맥길 마루금을 잡아 찾아 가고 있는데 도대체 끝머리에 대한 감은 잡기가 어렵다. 분명 28Km라 했으면 내 평소의 걸음으로 생각하면 열한시간이면 대충 끝나고 이 쯤이면 끝머리가 보여야 하는데 하는 생각으로 소나무 숲길을 걸어 내려 1시 15분 예덕리 윗보리밭에서 묘소에 올라오기 위해 만든 듯한 임도 곁에 커다란 고목 느티나무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 휴식을 취한다.
후미에서 오는 백두님에게 전화를 걸어 얼마를 더 가야 하는지 물어 보니 왕자산을 지나고도 큰 봉우리 두개를 더 잡아야 한다는 대답이 핸드폰을 타고 들어 온다. 오늘 오랜만에 제대로 하는 산행 걸렸다는 생각을 하며 털고 일어나 봉우리로 쳐주지도 않는 한차례의 커다란 출렁거림을 지나 13 : 41분 마을 맨 윗쪽 고개에 내린다. 처음에는 시간 상 적어도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고개에 내려 보니 이건 예덕리 마을 농로의 맨끝일 뿐이었다.
앞에 보이는 산이 태백 준령 처럼 까마득이 높아 보이는데 적어도 저 산을 넘으려해도 1시간이고, 능선을 타려면 2시간은 더 걸려야 될 듯 어림 짐작을 해 본다. 그렇다면 산행시간 끝이 12시간 반은 나와야 되고 거리가 도무지 안맞는다. 더위 속에서 막판에 이렇게 쳐 올리는 산을 보니 지리 종주보다 강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늘에서 휴식을 한 후 발걸음을 옮긴다. 강한 햇볕에 천천히 옮기는 발이지만 오르막에 힘을 안들일 방법은 없다. 땀으로 목욕을 한 끝에 14: 10분 능선위에 올라 지친 몸을 잠시 눕힌다. 혼자 보는 이 없으니 속옷만 남기고 벗어 능선위에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물이 어느 정도 남아 있나 체크를 해보니 그런대로 끝까지 모자라지는 않을 듯 싶다. 다시 몸을 추스려 왼쪽 능선을 따라 틀어 올려 한바탕의 씨름 끝에 봉우리를 올랐는데도 정맥리본은 우측 능선으로 갈 것을 말없이 보여줄 뿐 첩첩산중 깊은 계곡에 끝 점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백두님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구절재가 얼마나 큰 고개냐고 물어 보니 30번 국도라는 대답과 함께 후미는 이제 왕자산 오르는 길이라고 대답을 한다. 후미는 완전히 고통스럽겠다는 생각을 하며 능선을 따라 잠시 흘러가니 왼쪽으로 골짜기부터 능선 마루금까지 벌목을 해 놓았다. 왼쪽으로 틀어지는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벌목이 된 마루금은 얼마나 다리를 괴롭힐 작정인지 앞에 새카만 봉우리를 놓고 정신없이 내리막을 치닫는데 오른쪽 저 멀리 30번 국도가 굽이쳐 고개를 오르는 모습이 상수리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하니 도착하고 있음에 마음에 안도를 갖는다.
안부 그늘에 도착하니 먼저 가시던 산님들이 휴식을 마친 후 떠날 준비중인데 나는 배낭을 벗어 놓고 누워 잠깐 눈을 붙인다. 선뜻 놀라 눈을 뜨니 순식간에 10여분이 지나고 있다. 몸을 추스려 14 : 40분에 다시 발을 들어 올려 마지막 봉우리 능선에 땀으로 계단을 만들어 올리니 15: 05분에 전주이씨 묘소가 조용히 계곡을 내려다 보고 있는 439봉을 지난다. 능선을 잠시 걸어 30번 도로가 관통하는 끝머리를 내려다 보고 발길을 딛지만 내리막의 걸음걸이도 발바닥 물집으로 인해 속도가 더디다.
잡목을 헤치며 급경사를 따라 30번 국도 가까이 내려오던 길은 상수리 나무 숲 속으로 들어 갔다가 다시 끝마무리를 위한 출렁거림을 앞에 놓는다. 몸이 지쳐 있는데 이 고개 넘어 300여미터가 끝인데 일이분 빨리 가야 아무런 의미도 없을 일이니 나무 그늘에 누워 등산화를 벗어 본다. 예비 양말도 넣지 않았으니 젖은 양말 속에서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물집이 제법 커져 있다. 빨리 산을 내려가 슬리퍼를 신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일어나 야트막한 오름길을 지나 왼쪽으로 이어지는 급경사를 타고 내려 임도가 시작하는 밭 끝에서 오른쪽으로 굽어 내리는 임도를 따라 30번 국도에 15: 30분에 내려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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